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1)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1)
  • 경남일보
  • 승인 2013.08.1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2>이형기 시인의 출생지 서정리(하)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1)
<22>이형기 시인의 출생지 서정리(하) 
 
이형기 시인의 출생지를 찾아갈 때 곤명면 다솔사 입구를 지나갔다. 일행의 안내를 맡았던 한순조(1928·전 곤명농협조합장, 통일주체대의원)선생은 “다솔사 아래 신산부락 생각이 나는군요. 그 마을에 김두홍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김범부선생의 아들이자 김동리 소설가의 조카인 친구지요. 곤명보통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얼굴도 준수했고 공부도 잘했고 쾌활하기까지 했어요.” 필자는 다솔사 근처에 이르면서 김범부, 김동리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한선생이 그분들의 피붙이와 어울렸었다는 말을 하니까 “이분도 역사적이네”하고 속으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필자는 한선생의 손을 잡고는 즐거이 이것 저것 그분들에 대해 따져 묻기도 하고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이형기 시인의 출생지가 다솔사 주변이라는 점이 필자에게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에 젖게 된다. 이형기 시인이 한국 시단에서 중견의 자리를 확보해가고 있는 사이 이른바 ‘문단 쿠테타 세력’의 중심에 섰던 일이 생각 났기 때문이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 박종화 소설가가 장기 집무를 하고 있었는데 문단 일각에서는 한국문학의 상징적인 자리에 ‘비본격 소설가’를 모시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의 한국문인협회는 한국문단의 정통한 단체였고 이사장 또한 권위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고 문인이면 이 단체 회원이 되는 것이 거의 의무사항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져 이 단체에 거리를 두기 시작한 쪽이 오히려 정통한 세력이고 실력 있는 문인이 된다는 루머 아닌 루머가 돌아다니는 형편이다. 어쨌든 이형기는 반박종화 쿠테타 세력의 중심에 섰다.

이형기 문덕수 등 쿠테타 세력들은 끝내 총회에서 박종화를 물러 앉히고 김동리를 이사장의 자리에 앉혔다.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한국문단의 권력이었던 현대문학 주간 조연현 교수는 노발 대발 이형기와 문덕수를 불러 원상복구하라고 지시했다. 이 시기엔 ‘지시’라는 용어가 맞다. 이형기 시인은 진퇴양난의 어려운 입장이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서울로 올라가 자신이 당선된 ‘문예’지의 주간 조연현 선생댁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고, 그 조선생이 집안 처녀를 소개해 결혼도 했고, 그런 저런 인연이 칡넝쿨 같은 조연현 교수가 김동리를 사퇴시키고 박종화를 제자리로 복귀시키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형기는 물러설 수 있는 사안이 아니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이후 조연현과 이형기는 문단적인 문제서만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다솔사를 중심으로 소설을 썼던 김동리, 김동리를 회장으로 옹립하는데 앞장섰던 이형기가 다솔사 근처 서정리에서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다. 이형기 생가 마을을 다녀온 다음날 이형기시인의 사촌 동생 음악교사 이헌(李軒)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이헌을 보니까 박노정(현 이형기 시인 기념사업회장)시인과 함께 만나 보았던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이헌은 진주음악협회 감사를 맡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몇 줄 보탤까 한다.

이형기는 진주 요시노(吉野)소학교(후에 진주중안초등)에 입학하여 3학년때 유창한 일본말로 동화구연을 했다. 아버지 이경성과 어머니 김순금의 2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인의 출생당시 집안은 매우 어려운 편이었고 아들이 군청 서기라도 되길 바랐던 아버지는 이형기를 진주농림학교에 입학시켰다. 애초부터 이형기는 임업이나 농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동화, 소설, 시 등 문학작품에만 열중했다. 초등시절은 독서 3총사가 있어 그들과 경쟁하듯 독서를 해‘소설 미치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형기는 시인 이경순, 소설가 이병주의 제자로서 잠시 좌우익에 휩쓸려 부산으로 가 노동을 하기도 했다. 대학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로 가자 집안에서는 “중이 될 것이다.”라 했는데 일찍이 트럭운전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장이 되었지만 곤궁을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교과를 갔지만 처음부터 그는 신문사 기자로 입사하여 학생-기자 두 영역을 뛰었다. 그의 시에는 불교적 파편이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