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길을 묻는다
길에서 길을 묻는다
  • 경남일보
  • 승인 2013.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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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숙자 (시인)
올해 첫 산나리꽃이 피어났다. 폭염과 지루한 햇살속, 분답한 생활인 마인드에서 벗어나 헐렁한 여행자 구도로 세팅하여 길을 나섰다. 남도의 여름은 뜨거운 태양 아래 작열하고 있다. 이리저리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바람의 여행자가 되어 길을 묻는다.

산중턱 다산초당의 고즈넉함이 상처 입은 새처럼 할딱이는 가슴에 가만히 마음을 내려 놓으라고 이마를 쓸어 준다. 아름드리 동백이 숲을 이룬 한적한 백련사, 보살이 내어 준 무덤덤한 팥빙수 한그릇에도 달달해지는 게 여행자의 기분이다. 뙤약볕이 작열하는 증도의 소금밭은 바라보는것 만으로도 고통이다. 통풍 때문인지 얼기설기 나무로 만들어 놓은 수많은 소금창고들. 뜨거운 바람만이 간간이 찾아와 안부를 물어보고 가는지 창고 속에는 눈물방울처럼 하얀 소금의 결정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다. 그런 소금을 두고 바다의 눈물, 바다의 아픔이라고 어느 시인은 읊었다.

상처가 상처를 치유하는 여행길. 풍경 속에서 저절로 힐링이 되는 자연치유의 힘을 얻는다. 길위에서는 때때로 길을 잃어야 여행의 맛이 더해지기도 한다. 왜 그토록 가슴 설레며 여행가방을 꾸려야 했는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행을 떠나왔는지조차 헛갈리는 순간들도 문득문득 찾아와야 한다. 이런 순간들이 자주 찾아올수록 여행은 더욱 충만해진다. 적어도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다시 점검해 보고 계획해 보고 수정해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호화여행도 갈까 말까인 평균연령 76세인 할배들이 배낭여행을 하는 뒷이야기들이다. 부모님이나 연로하신 분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의도는 지극히 휼륭하지만 쉽지 않은 것 중에 하나가 효도여행이란 것을.

특히 배낭여행은 젊어서 하면 낭만과 도전이지만 나이 들어서는 생애 중요한 모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다리 떨릴 때 하는 것보다 가슴 떨릴 때 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좌충우돌 여행은 일단 재미있다. 파리의 한 민박집에서 만난 20대의 여대생이 70평생을 산 할배들보다 경험이 더 많은 인생선배처럼 느껴진다는 대목에서는 마음이 짠했다.

할배들이 저 나이였을 때는 먹고사는 문제가 더 크게 다가와 마음 놓고 해외여행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랬는데 지금 와서 여행을 하려니 서투르고 모르는 것투성이다 보니 모든 게 두렵다는 느낌부터 먼저 드는데 요즘의 젊은이들은 도무지 무섭고 두려울 게 없다는 것이다.

파리의 에펠탑 아래 서고 보니 내가 세상을 헛살았나 싶기도 한 게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시청자들에겐 웃음과 감동을 주었겠지만 할배들에겐 어쩌면 생애 마지막 배낭여행이 될 것이니 애틋한 추억 그 이상이 될 것이다.

몇 해 전 은퇴한 22층의 류 선생님이 또다시 여행가방을 들고 떠나셨다. 지난번 한달 넘게 서유럽을 다녀 온 뒤 여행책자까지 내는 열정을 보이시더니 이번에는 북유럽 40여일 간의 길고도 고단한 배낭여행의 여정에 고생길을 나섰다. SNS에 시시각각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여행은 별탈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여행의 꽃인 실수와 에피소드도 양념처럼 재미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도 중독같고 탐닉같다. 여행 생활자만이 아는 묘한 에너지가 있다.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는 세상이치.

날마다 똑같이 주어지는 일상이 어떤 그릇에 담겨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일생이 될지는 몹시 기대되는 일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가 내 생활에 스며들어 몹시 혼란스럽고 힘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수많은 갈래길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종종 헤매기도 하지만 내가 나로 존재하는 재충전의 시간은 분명 필요하다. 존재의 지점에서 목적의 지점까지의 변위.다시 길 위에서 길을 찾아 나서 보아야 하는 게 인생 여정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쳐 돌아온 집. 내 방에서 내 베개를 베고 잠이 들면 아 집이 좋구나 하는 뿌듯한 재충전의 기분을 만끽할 것이다.

산나리꽃의 절정 속에서 8월도 다 간다. 때때로 멈추어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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