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2)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2)
  • 경남일보
  • 승인 201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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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후반기 동인 조향 태생지 환덕리(1)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2)
<23>후반기 동인 조향 태생지 환덕리(1) 
 
모더니즘 동인회 <후반기> 멤버로 한국 현대시의 최첨단에 섰던 시인 조향(趙鄕, 본명 趙燮濟 1917-1984)의 태생지는 사천시 곤양면(昆陽面) 환덕리(還德里)다. 이형기 시인의 태생지 서정리에서 4K쯤 축동면쪽으로 떨어져 있는 오지마을이다.

필자는 이형기 시인의 생가 쪽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전, 그것도 오래 전에 우리나라 현대시사가 빚지고 있는 조향 시인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적이 있었다.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사천군 어디 오지 마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문학사전을 펼쳐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인의 태생지는 사천시 곤양면 환덕리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곳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가급적 빨리 방문해 보고 싶었다. 마침 자주 만나는 친구 배창도 시인(시집 ‘문수암 가는 길’)의 외가가 그쪽 주변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함께 ‘환덕리’로 향했다. 출발 시간은 2013년 8월 23일 오후 3시였다. 필자는 지금 환덕리로 갈 형편이 못되었다. 오전엔 진주시청에서 시보 편집회의를 했고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원고 10매짜리 서울로 송고하고 나니 3시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다 경남도사 원고 제쳐 놓고, 또 두 종류의 긴 산문 청탁 제쳐 놓고 환덕리로 간다, 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출발했다.

축동면 소재지로 가서 구도로를 타고 곤양 가는 길로 들어섰는데 가는 길에 ‘중앙’ 횟집 마을 가면서 낯이 익은 진입로를 발견하고는 마음이 한결 훈훈해졌다. 중앙이라는 곳은 석화 생산으로 유명하고 양질의 회를 내놓는 횟집 동네로도 소문이 나 있다. 축동에서 한 30리쯤 달려가니 왼쪽 산비탈로 드는 환덕리 마을 표지판이 나왔다. 좌회전 하여 차를 모는데 경사가 지나치게 가파르다. 경사가 30도쯤 될까? 허이 허이 올라가는데 150미터쯤 오르니까 고개가 나오고 거기서부터는 나무들도 너그러운 포즈를 취하고 잎들이 향기를 뿜기 시작했다. 구비 구비 내려가니까 경사진 비탈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여기가 환덕리가 아니고 더 가야 나오는 마을일 것이라는 예단은 빗나갔다. 산청군 중산리나 오봉리나 지리산 아래 가현이나 세동마을 같은 마을 모양을 하고 있다. 인민군들의 임시 본부로 쓸 수 있는, 한 번 들어가면 바깥과는 절연하는 곳 같은 그런 지대요 부락이었다.

그래도 마을회관이 있고 그 앞에 수백년 느티나무가 있고 마을 정자가 있고 2미터 아래 50평 넓이의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다. 배려가 눈물겨웠다. 산이 둘러싼 곳이고 그 허리쯤에 마을이 얹혀 있고 그 밑으로 기슭으로 뻗는데 전망이 없다. 내려가서 또 어디 출구를 모색해야 하는 곳이었다. 작은 해방구로 삼을 만했다. 차를 세우고 정자를 향해 오르니 그 옆에는 <환덕마을 동신단>이라는 제목의 마을 안내문이 있었다.

“이 마을은 함안 조씨 시조 휘 정(鼎)의 16대손 휘 은복(殷福) 어모장군(禦侮將軍)이 임진왜란 당시 진주금산전투에서 순직하고 마동에서 부인과 두 아들이 피난처로 미곡산(목단)에거취후 차남 휘 석(碩, 정3품)이 환덕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동신단을 모신연도는 미상이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4백년전으로 추정되며 조상으로부터 전래되었다.”

마을이 함안조씨 집성촌인데 마을 형성의 내력을 기술해놓고 있다. 거기다 동신단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단으로 정성을 다해왔다는 것이다. 정자에는 남자 노인 두 분, 여자 노인 세 분이 부채를 부치며 담소하고 있었다. 필자는 노인들에게 환덕리를 찾은 것은 이 마을 출신 조향 선생(趙燮濟)의 생가를 둘러 보고 그분의 자료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중 마을의 좌장으로 보이는 조한제(趙漢濟, 1930년생) 선생은 자기도 이 마을에서 조부대에 산청 삼장 언저리로 나가 살다가 64년 전에 귀향했기 때문에 자기보다 13살이나 위 형님(3종형)인 조향선생이 몇 살 때 나갔으며 마산으로 나가 산 것 정도만 알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생가는 알아 볼 수 있느냐 하니까 알려져 있지 않고 조씨 재실은 있다고 말했다. 환덕리는 조씨 집성촌인데 예전엔 마을 호수가 70호는 되었으나 지금은 35호로 줄어들었다고 했다. 그중 조씨는 얼마 되지 않고 들어온 사람들이 더 많이 불어났다고 전해 주었다.

조향 시인의 생가마을인 이 환덕리는 ‘환덕리 환덕마을’로 ‘본환덕’으로 일컬어진다고 한다.“본환덕’이 있는 것 보니까 다른 환덕도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저 아래는 ‘원환덕’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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