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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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3.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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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후반기 동인 조향 시인 출생지 환덕리(3)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4)
<25>후반기 동인 조향 시인 출생지 환덕리(3)
 
조향은 출생지 곤양 환덕리에서 아버지 공직 근무지 산청으로 가서 몇 년 있다가 진주로 나왔다. 그의 동생 조봉제 시인이 산청에서 났고 그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일가가 진주로 나와 산 것으로 보인다. 조봉제의 출생지는 문학사전에 따라 다르다. 어떤 데는 ‘산청’이고 어떤 데는 진주로 되어 있다. 진주에서도 옥봉동에서 났다고 적혀 있다. 그런 것으로 보아 조봉제가 산청에서 났지만 전국적으로는 산청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조봉제 스스로 진주 출생으로 기록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의령 출신이나 함안 출신들이 서울 사람들에게 마산이 집이라 한다거나 하동이나 산청, 함양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에게 진주에 집이 있다고 하는 사례가 있는데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하겠다.

조향 시인의 제자로 사천 사남면 출신 고 구연식 교수가 있고 진주의 수필가 고 김토근, 시인 이덕이 있다. 조향 시인이 우리나라 초현실주의를 끌고 간 대표적인 시인이었으므로 그의 제자들도 우리나라 전역에서 초현실주의의 향도로 활약해 왔다. 구연식 교수는 조향의 제자이면서 동아대 국문과 후배교수로 봉직했다. 구교수의 시도 그런 형인데 1955년 조봉제 이인영 등과 초현실주의 동인 잡지 가이가(Geiger)에 참여하고 1962년 첫시집 ‘검은 산호의 도시’를 내어 서정 일변도의 시단에 작은 파장을 주었다.

이덕 시인도 동아대 재학 중 그 가이가 멤버였다. 부산 광복동 다방이나 ‘태백싸롱’을 드나드는 멤버는 조유로, 하근찬, 이호진, 그리고 구연식이었다. 이덕 시인의 시도 경남문학이나 진주문단에 주로 발표해왔는데 시인들 중 가장 이질적인 시를 쓴 것으로 화제가 되곤 했다. 슈르풍인 점에서 스승의 주장에 합류하는, 철저한 가이가 시인으로 초지일관하는 미덕을 보여 주었다. 조향 시인은 시집 한 권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의 고전으로 자리집고 있다.앞으로 그의 시집을 묶어내는 견실한 출판사가 나오길 기대한다. 어쩌면 경남대학교 박태일 교수의 지역문학 탐구 시리즈에 얹힐지도 모른다. 그간 박교수는 지역문학 총서를 그가 지도한 연구가들과 함께 내고 있는데, 김상훈전집, 포백 김동한전집(한정호), 정진업전집, 신고송문학전집(김봉희), 허민전집, 서덕출전집, 파성 설창수문학의 이해(김봉희 외) 등을 내면서 업적의 탑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소리없이 박수를 치고 있을 것이다.

조향처럼 이덕 시인도 아직 시집 한 권 내지 않고 있다. 그의 스승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덕시인은 “조향 시인은 캠퍼스 안에서 멋쟁이었어요.상아 파이프에 양담배를 반으로 잘라 비벼넣고 연기를 후 불어내었지요. 술은 양주 아니면 먹지 않았고 인상은 언제나 단정했어요.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양복 바지는 칼날같이 줄이 섰어요. 양복을 입고 학교에 나온 학생에게는 ‘너 완월동 한 번 다녀와라.’고 농담반 진담반 권고하는 것도 보았지요. 이런 언행이 슈르풍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덕 시인은 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조선생은 교과서를 직접 저술해 강의했고, 서양 이론에 해박했다는 기억이 납니다. 당시 ‘사상’(월간), ‘신태양’ 등에 연재를 했고 졸업생들 취직 추천서를 귀찮다 하지 않고 써주었지요. 나도 추천서를 하나 받았지만 써먹지 않았지요. 그리고 학교신문 시단에 시를 써내면 조선생께서 뽑아 시평을 써서 발표를 시켜 주었는데 나는 3번 발표를 한 기억이 있어요. 김토근 수필가는 1번 뽑혔어요.“

인터넷에서 본 자료 가운데 K모씨의 회고를 읽어보면 조향시인이 동아대학교 교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 나온다. 당시 J씨가 총장이었는데 느닷없이 조향 교수가 총장 후임 출마설이 떠돌았다는 것이다. 술집에서 나온 설인지, 근거는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조향 시인은 오너 총장의 눈 밖에 났다는 것 아닌가. 조향 시인은 결국 대학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1967년경 필자가 명지대학에서 열린 국어국문학 학술 발표회에 갔을 때 조향 시인이 주제 발표자에 끼여 있었는데, 그때 먼빛으로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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