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5)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5)
  • 경남일보
  • 승인 201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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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이주홍 생가, 시비, 어린이문학관 (1)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65)
<26>이주홍 생가, 시비, 어린이문학관 (1) 
 
소설가요 아동문학가인 향파 이주홍(向破 李周洪, 1906-1987)의 생가는 합천읍 금양리(사동)다.

아버지 이정식과 어머니 강정화 사이 장남으로 태어나 합천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고학으로 한성중학원을 수료했으며 노동을 하며 일본 각지를 전전했다. 그후 잡지사 기자와 교사로 재직하면서 창작을 계속하여 1925년 ‘신소년’에 동화 ‘뱀새끼의 무도’로 문단에 등장했다.

지난 10일 합천읍에 닿아 손국복(야로중학교장) 시인과 정유미(합천문협 사무국장)시인의 안내를 받아 합천읍에서 10리쯤되는, 해인사 가는 길목에 있는 같은 합천읍에 속하는 금양리(사동)를 찾았다. 이곳이 이주홍의 생가마을이었다. 길가 오른 편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인데 10호가 될락말락한 작은 마을이었다. 입구에 ‘향파 이주홍선생 생가터’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표지석은 합천군에서 이주홍 탄생 100주년 되는 해 2006년 6월 4일에 건립했다.

향파 이주홍선생기념사업회는 이보다 앞선 2006년 1월 18일에 조직되었었다.

표지석을 지나면 바로 오른 쪽이 마굿간인데 길에서는 벽으로 막혀 있어서 안쪽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이 생가터 중에서 아래채다. 이 집 역시 길에서는 돌아앉아 있다. 그 다음이 굽어져 들어가는 생가터 입구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대문도 없이 붉은 벽돌집이 나온다. 윗채이다. 아래채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주홍 작가가 살던 시절에 있었던 집의 원형에 가깝다고 동네 사람이 말해 주었다. 마당이 비좁은 것으로 보아 생가로서의 윗채는 초가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아래채가 끝나는 자리에 마굿간이 있었고 소가 세 마리쯤 수용되어 있었다. 그 곁에 대추나무가 서 있었는데 담장 밖으로까지 휘어져 나가 있었다. 탐스런 푸른 대추 두어개를 따 먹었다. 맛이 아직 엉기지 않았다. 그래도 대추였다. 이주홍 작가가 어린 시절 입에 다실 것이 없을 때 하나 둘 입에다 따 넣었을 것이다.

생가 앞 서북쪽으로 나 있는 도로는 해인사로 가는 길이라는데 마을이 어디 바로 깃들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작가는 만년에 고향을 찾았을 때 해인사로 직행했던 것인지 모른다. 1973년 이후 몇 번 진주나들이를 했을 때 진주의 동기 이경순 시인을 만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때 마다 이경순 시인은 필자를 불렀다. 식사를 대접해 드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해인사로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홍도여관이 있는데 거기가 집처럼 편하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왜 생가에 들른다는 말을 하지 않고 홍도여관으로 간다 했을까, 필자는 약간은 의아스러웠다. 어떤 때는 이경순 시인을 대동하고 가기도 했는데 “하룻밤 같이 유하고 왔어.”라고 이경순 시인은 그 뒷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해 주었다.

필자는 해인사를 찾을 때는 예의 ‘홍도여관’을 꼭 찾아 보리라 다짐을 했는데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사이 그 여관이 없어져 버렸다. 그 뒤 경상남도 산업시찰단에 끼여서, 경상대학교 교수 연수단에 끼여서, 신문방송사 연수회에 끼여서, 더러 더러 해인사에 왔지만 그만한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치다가 어, 어 하는 사이 집이 없어져 버린 그 허망함! 필자는 정서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언젠가 작가의 생가를 찾듯이 작가가 편했다는 그 여관의 없어진 터를 목표로 해인사행 버스에 오를 것이라 약속한다. 물론 필자가 필자에게 거는 손가락걸이로!

해인사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해인사에 머리 깎고 들어갔던 ‘금성’ 동인 유엽(柳葉)을 더듬어 볼 필요를 느낀다. 박태일 교수의 ‘합천 지역시의 흐름’(2007, 합천예술문화연구)에서는 유엽이 해인사 강원에 머물 때 최인욱(소설가), 허민(시인) 등을 가르쳤으며 1925년에 문단에 데뷔한 이주홍은 1930년대 잠시 해인사에 머물고 이들과 친교를 맺었다고 밝히고 있다. 필자는 다만 유엽의 그의 행적을 보아 해인사에 머문 시간이 너무 길다는 느낌이 있다. 어쨌든 이주홍이 이들 문인들과의 교감이 깃들어 있는 해인사 또는 그 언저리를 스스로의 정신적 생가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자장에 홍도여관이 놓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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