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의 추억
한가위의 추억
  • 경남일보
  • 승인 201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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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희지 (소설가)
추석이 한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초저녁잠이 들었나 보다. 어슴프레한 꿈결에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니 훤한 달빛이 작은 내 방에 가득 고였고 창 너머에는 만월을 향해 차오르는 달이 걸려 있었다. 아, 한가위가 다가오네.

강변으로 나가 달빛을 동무삼아 걷노라니 어린 시절의 한가위 고향풍경이 불현 듯 떠올랐다.

“엄마야, 엄마야. 어디까지 왔노.”

“당산고개까지 왔다.”

“또 어디까지 왔노.”

“조금만 참아라. 집에 다 왔다…….”

장에 가신 어머니가 돌아오시길 기다리며 동무들과 함께 동네어귀에서 부르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날 아침, 우리 어머니들은 여름 동안 키워 거둔 콩과 곡식, 닭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을 함지에 잔뜩 담아 이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를 태운 완행버스가 먼지를 자욱 일으키며 사라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학교로 갔다. 그 날은 하루가 유난히도 길었다. 장에서 돌아오실 어머니의 함지 속에 꼭꼭 쌓여져 있을 추석빔 생각에 수업시간에도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하교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우리는 황급히 마을 어귀로 어머니를 마중 나갔다. 마침 산모롱이를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보고는 내닫치게 달려가 껴안았다.

함지 속에는 맨드라미 꽃잎 같은 분홍색 블라우스와 나비 달린 구두 한 켤레가 들어있었다. 그날 밤, 나는 그것을 꼭 껴안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깊이 잠들 수 없었다. 빨리 일어나 새 옷을 또 입어보고 싶어서였다.

추석 날 새벽에는 분홍색 블라우스에 새 구두를 신고 골목길을 누볐다. 이 골목 저 골목을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

형제 사촌들이 모여서 차례를 지내고 나면 훌렁 점심때가 되어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부엌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치맛자락을 들쳐서 손 때 묻은 주머니를 열고 십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고사리 같은 손에 꼭 쥐어 주었다. 딱 오늘만 같아라. 너무 기뻐서 하늘을 날 듯 껑충껑충 뛰었다.

그 시절은 대개 가난한 살림살이였다. 그래서 명절 때나 되어서야 사 입을 수 있었던 새 옷 한 벌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던 어린 날의 한가위가 그리워진다. 모든 것이 풍족한 현재의 행복보다 그 가난한 때의 추석절 행복이 더 가슴깊이 와 닿는다.

만월을 향해 차오르는 달을 보며 지금 아이들이 훗날 장년이 되었을 때 고향의 명절을 무엇으로 추억할지. 우리 아이들에게 행복한 명절로 추억되도록 어른들은 무엇을 해 주어야 할지를 이번 추석엔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최미희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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