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햇살과 나
바람과 햇살과 나
  • 경남일보
  • 승인 2013.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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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숙자 (시인)
우리는 모두 행복한 꽃이라 하던 남천 송수남 화백은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가 한지에 먹물이 스며드는 때다. 그때의 묵향이 참 그윽하다. 한지에 서서히 번지며 스며 들어가는 먹물처럼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조화이며 거스름 없는 삶이다. 사람도 변하고 이념도 변하지만 자연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꽃과 자연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리는 이유를 말해 왔다.

지난 6월 별세 때 “내 장례식엔 모두가 화사한 복장으로 꽃을 들고, 생전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유언에 따라 장례식장 영정 사진 앞은 엄숙하고 침울한 하얀 국화 대신 색색의 예쁜 꽃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나비가 꽃잎을 흔들듯이 바람이 햇살에게 안부를 속삭이듯이 우리에게 남은 위안은 무엇일까. 한 생애의 치열한 전리품인 돈과 명예와 작품 등을 남기고 가는 마지막 여정에 끝까지 나를 아름답게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 짓지마/햇살과 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나도 괴로운 일이 많았지만/살아 있어 좋았어/너도 약해지지 마”시 쓰는 할머니 시바타도요가 100세 때 쓴 시라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여관과 식당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살았고 젊은 시절에는 결혼과 이혼의 아픔을 겪고 온갖 산전수전 고생을 하며 살다가 99세 때 자신의 장례비용 100만엔으로 시집 ‘약해지지마’를 냈다.

폭우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슬며시 남아 있는 단단하고 야문 조약돌처럼 인생 100년의 거친 질곡의 강을 건너서 한점 사리로 남아 있는 할머니는 일상을 시로 얘기한다. 배운 것 없이 늘 가난했던 일생이었으나 또박또박 생활의 희로애락을 써내려 간 진솔하고 평범한 이야기가 사람의 심금을 울려서 감동의 선물을 안겨 주었다.

시라는 것을 배워 본 적도 없는 할머니가 삶의 흔적과 이면에 밴 사유와 고통의 소중함을 노래한 좋은 시란 기교가 아니라 감동이란 걸 알겠다. 사람들에게 잔잔한 치유의 선물을 안겨주고 할머니는 101세로 바람과 햇살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삶은 지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 지혜로 사는 것이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리라. 오늘이 우리 삶의 절정이다. 외롭다고 고통스럽다고 징징댈 일이 아니다. 외로운 이유도 힘이 드는 이유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먹물 같은 우리 삶이 화선지에 스며들다 아직 미치지 못한 여백 같은 것. 다시 생각해 보면 살아야 할 세상과 내가 조화를 이뤄가야 할 경계 같은 것이다.

살아가면서 사라지거나 놓쳐 버렸거나 흘려 버린 것들 속에서 절망한 적도 많았다. 하나 하늘을 보고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나면 아득하게 자맥질하던 슬픔 같은 것들이 어느새 희망의 힘으로 슬금슬금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때때로 시간의 갈피 사이에서 깨알같이 숨어 있는 그보다 훨씬 많았던 웃을 일들이 나를 위해 반짝여 주었을 것이다.

로키산맥 해발 3000m 고지 수목 한계선 지대에는 혹한과 매서운 바람 때문에 나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저절로 무릎 꿇은 삶을 배우게 된 이 나무들이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바이올린으로 탄생된다는 것이다.

삶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묵묵히 살아가다 보면 내가 좋아서 평생을 해온 결과물이나 업적이 나의 인생을 가치 있게 대변해 주지 않겠는가.

내가 그린 그림이 한 점 배경으로 놓여져 있고 내 시를 두어편 낭송하는 조촐한 장례식장의 풍경을 나는 유언하리라.

바람과 햇살과 더불어 해 지는 줄 모르고 웃음과 수다를 떠는 노년의 잔잔한 평화를 꿈꾸어 본다. 끝내 삶은 행복한 꽃으로 남기를.

황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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