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남강유등, 과거·현재·미래를 찾아서
남강에 띄워진 유등은 진주시민들의 희망이다. 임진왜란때는 진주성을 지키기 위한 사민(士民)들의 희망이었고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에는 잘 살아보겠다는 서민들의 희망이었다. 문화관광산업이 창궐했던 밀레니엄 시대 초입에는 진주의 자존심을 전국에 알리는 희망의 단초가 됐고 2013년 이후에는 세계속 진주로 키워나갈 희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곧 진주사람들의 자부심이요, 삶이요, 희망이다. 진주남강유등축제가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급성장하기까지 여기에는 진주사람들의 애환이 이처럼 오롯이 담겨져 있다. 420여년의 기나긴 세월속에 끈질기게 인연을 맺어온 남강 유등은 그래서 진주사람들이 보존하고 지켜내야할 사명이다./편집자주
◆400년 전 유등의 뿌리 : 임진왜란에서 시작되다
유등은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적을 물리치기 위한 군사신호, 통신수단 등으로 활용됐다는 설과 논개사후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등을 띄웠다는 설이 있다. 어떤 설이 정확한 사실인지는 불분명 하지만 역사속 당시 상황을 이야기식으로 꾸며봤다.
#1592년 10월 2만명이 넘는 왜군들이 진주성으로 침투했다. 평화롭던 진주성은 순식간에 적들에 의해 포위되고 성내는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3800여명의 병력으로는 중과부적.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왜군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대나무 다리를 만들었고 이때 아군은 횃불과 화약을 넣은 유등 전술로 왜군의 침투를 저지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불리했다. 다행히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곽재우를 비롯한 성 외곽지역 의병들이 진주성으로 몰려들었다. 적을 타격하기 위해서는 성안팎에서의 일제공격이 유효하다는 판단에 따라 동시공격을 알릴 신호로 풍등을 사용했다. 밀고 밀리는 지리한 전투가 계속되고 아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성밖에서 노심초사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유등에 담아 흐르는 강물에 띄워 소식을 전했다. 결국 6일간 치열한 공방전 끝에 왜군은 손을 들었다. 임진왜란 3대첩중 하나인 진주대첩에서 이처럼 유등은 적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신호로, 통신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 마침내 성은 함락됐다.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관기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왜장과 마주섰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고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둘은 모두 죽고 말았다. 논개가 죽은후 당시 기생들과 일반 백성들이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남강에 유등을 띄웠다.
#개천예술제와 성장하다
◆400년 전 유등의 뿌리 : 임진왜란에서 시작되다
유등은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적을 물리치기 위한 군사신호, 통신수단 등으로 활용됐다는 설과 논개사후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등을 띄웠다는 설이 있다. 어떤 설이 정확한 사실인지는 불분명 하지만 역사속 당시 상황을 이야기식으로 꾸며봤다.
#1592년 10월 2만명이 넘는 왜군들이 진주성으로 침투했다. 평화롭던 진주성은 순식간에 적들에 의해 포위되고 성내는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3800여명의 병력으로는 중과부적.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왜군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대나무 다리를 만들었고 이때 아군은 횃불과 화약을 넣은 유등 전술로 왜군의 침투를 저지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불리했다. 다행히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곽재우를 비롯한 성 외곽지역 의병들이 진주성으로 몰려들었다. 적을 타격하기 위해서는 성안팎에서의 일제공격이 유효하다는 판단에 따라 동시공격을 알릴 신호로 풍등을 사용했다. 밀고 밀리는 지리한 전투가 계속되고 아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성밖에서 노심초사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유등에 담아 흐르는 강물에 띄워 소식을 전했다. 결국 6일간 치열한 공방전 끝에 왜군은 손을 들었다. 임진왜란 3대첩중 하나인 진주대첩에서 이처럼 유등은 적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신호로, 통신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 마침내 성은 함락됐다.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관기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왜장과 마주섰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고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둘은 모두 죽고 말았다. 논개가 죽은후 당시 기생들과 일반 백성들이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남강에 유등을 띄웠다.
#개천예술제와 성장하다
400여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간직한 유등은 개천예술제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개천예술제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유등축제의 발전과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개천예술제의 성장과정속에 꽃 피운 유등놀이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1990년 40주년을 맞아 발간된 개천예술제 40년사에서 파성 설창수 선생은 개천예술제 창제 동기를 ‘유사이래 대한민국 세운 돌 맞이 잔치를 의논하게 됐다. 동시에 경술국치 후로 근 40년의 왜제 압정에서 해방된 자주독립 국민으로서(생략…)일대 민족영광과 기쁨을 예술 올림피아로서 전개하여(생략…)광복민족임을 자축하고자…’라고 적시했다. 1949년 정부수립과 자주독립 1주년을 기리고 예술문화의 발전을 위해 영남예술제가 탄생됐다. 이듬해 1950년에는 6·25전쟁으로 궐제됐고 1951년에 제2회 영남예술제가 개최됐다. 특히 유등놀이는 가장행렬과 함께 제6회 제전때인 1955년부터 생겨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축하행사로 분류되어 있다. 40년사에 이은 60년사(2010년 발간)를 토대로 개천예술제속 남강유등축제를 살펴본다.
①초창기(1~11회-1949~1960년)
남강유등축제는 가장행렬과 함께 1955년 제6회 제전때부터 등장하고 있다. 경연행사 외 축하행사로 분류된 유등축제는 당시 유등대회를 명명돼 시작됐다. 유등대회는 당일 오후 7시 진주중등교육회 주최로 개최됐다. 그리고 시내 각 기관 주최로 축문과 축등 설치가 본격적으로 시내 요소 요소에 이루어지게되면서 제전 분위기가 한층 고조됐다. 7회제전(1956년)때는 6회 수준으로 유지됐지만 8회 때는 꽃불놀이가 추가됐다. 낮에는 시가지를 가장행렬로 수놓고 밤에는 하늘과 수면을 온통 꽃불로 치장하는 장관이 연출됐다. 11회(1960년) 때부터는 유등과 꽃불놀이의 범위가 점차 확대됐다.
②시련기(12~21회-1961~1970년)
이 기간은 5·16으로부터 시작된 사회질서의 재편기에 해당된다. 예술제도 예외없이 이 재편의 틀 속에 놓일 수 밖에 없었고 행사도 상당기간 비자율적인 운영이 불가피 했다. 제12회(1961년)때에도 축하행사로 유등대회와 축등행렬이 이어졌고 축하봉화대회가 베풀어졌다. 이 시기에는 유등대회 보다는 가장행렬에 더 무게중심이 실리고 있다. 이때 가장행렬의 경우 경연에 주제를 미리 정해 운영됐다. 눈에 띄는 것은 제16회(1965년)때부터 예술인합동회갑연이 축하행사로 개설됐다는 점이다.
③격동기(22~30회-1971~1980년)
70년대는 전국적으로 개천예술제와 유사한 행사들이 개최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이 많이 퇴조된 시기다. 예산확보도 힘들었고 중앙예술인들의 애정도 상당히 바래졌다. 그래서 그런지 유등대회에 대한 언급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주제를 미리정해 펼쳐오던 가장행렬이 제29회(1978년)부터는 경상남도 교육감기 쟁탈 경연대회로 하여 개최된점이 돋보인다.
④중흥기(31~40회-1981~1990년)
31회(1981년) 때부터 문총 예총지부가 주최해 왔던 개천예술제가 31회때부터 개천예술재단이 주최를 하고 예총진주지부가 주관을 하게 됐다. 거기다 33회부터는 정부의 문예진흥정책에 힘입어 도종합예술제로 지정됐다. 예술증흥의 시기에 접어들게 된 셈이다. 때를 같이해 유등대회에도 31회때부터는 유등의 고정등이 등장했다. 진주중학교, 진주대아중학교, 진주동명중학교, 진주상업고등학교 등이 참가해 용이나 거북선 등의 고정등에 깜박등을 밝혔다.
⑤안정기(41~50회-1991~2000년)
1991년부터 2000년까지 개천예술제는 비교적 안정기를 유지했다. 다만 대회기간이 6일에서 9일로 늘어난 점과 제50회부터 유등이 ‘진주남강국제유등축제’라는 이름으로 개천예술제로부터 분리해 나가는 준비과정을 거친점이 가장 특이하다.
이에앞서 유등대회는 여전히 축하행사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는데 제44회때 교육감기 쟁탈 유등대회가 열린점이 눈에 띈다. 유등대회는 유등부와 고정등부로 나눠 치러졌고 유등부에 경해여고 제일여고 삼현여고 선명여상이 참가했다. 고정등부에는 진주중 진주남중 대동기계 세광공고 동명고교 등이 참가했다.
특히 제47회(1997년)때는 유등축제에 있어 달라진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진주시내 여자고등학교 4개교에서 각 25개씩 유등을 띄웠는데 총 1000개의 등이 남강을 수놓았다. 그리고 대회기간중 매일 오후 6시 일반시민들이 부교 옆 유등장소에서 띄우는 것도 볼거리였다. 아울러 고정등 출품이 보다 격을 갖추고 종류를 늘려 가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제49회(1999년)때는 고정등과 유등 뿐 아니라 전통등과 창작등이 등장했다. 곧 등축제가 단독 독립행사로 분리되어 나가는 예행연습이자 전주곡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⑥정립기(51~60회-2001~2010년)
유등축제는 51회(2001년)부터 제2회 세계진주남강유등축제로 별개로 분리되어 나갔기 때문에 프로그램속에는 특별기획행사로 이름을 올렸다. 사실상 개천예술제와는 다른 축제가 된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진주사람들은 행사 기간이 서로 같기 때문에 두 축제는 상생 상보의 관계로 생각했다. 남강으로 나가면 등축제가 되고 시가지로 나가면 개천예술제가 되는 그런 묘한 양립의 관계를 보였다. 진주남강유등축제는 그동안 독특한 아이디어와 행사기획력이 부가되면서 2010년 대한민국대표축제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게됐다.
#세계속 진주남강유등축제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지난 2000년에 ‘진주남강 국제등축제’로 개최한 이래 2002년 지역특성화 축제, 2003년 문화관광 예비축제, 2004년 육성축제, 2005년 우수축제, 2006~2010년 최우수 축제에 이어 2011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돼 명실상부 국내 최대 최고의 축제로 손꼽히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축제인 만큼 각종 상도 휩쓸었다. 2011년 세계축제협회(IFEA) 피너클 어워드에서 금상 3개와 동상 1개를 수상한데 이어 올해도 2개 부문을 석권했다. 이러한 성과에 힙입어 진주남강유등축제는 마침내 국내 처음으로 문화수출 도시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지난 2월 캐나다 오타와 윈터루드 축제 수출에 이어 미국 LA한인축제, 캐나다 나이아가라 빛 축제 진출 등 문화수출 및 글로벌 축제도시로 도약하고 있다. 지난 11일에는 데이빗 채터슨 주한 캐나다 대사가 진주시청을 방문해 이창희 진주시장과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진주남강유등축제와 캐나다 윈터루드 축제간 협력을 공고히 다지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세계적인 축제의 현장에 진주남강유등이 초청을 받아 당당히 위용을 자랑하게 된 시대가 도래됐다. 내년에는 고등학교 사회문화교과서에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실리게 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유등축제는 더 이상 지역속의 축제가 아니라 세계속 축제임을 입증한 셈이다.
자료제공=진주문화예술재단
남강 유등은 내 마음의 고향…갈등 털고 일어섰으면
서울 사는 진주 출신 성택씨의 기억
# 20살에 고향 진주를 떠나 26년째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성택이는 지난해 가을, 청계천을 찾았다. 한국방문의해 마지막 서울등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오색찬란한 등을 보면서 성택이는 어린시절 고향 진주 남강변에 떠 있던 유등을 떠 올렸다.
촉석루 아래 남강변에 형형색색 뽐을 내던 유등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무더위 속에서도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등을 만들던 기억, 완성된 등을 이동시켜 남강위에 띄웠을때의 환희, 다른 학교보다 더 잘만들어야지 하고 오기심이 발동했던 그 시절이 선명하게 떠 올랐다.
‘70~80년대 진주에서 학교를 다닌 학생이라면 10월 첫째 주 최소한 1주일은 공부고 뭐고 다 싫었을 것이고 이때 처음 술을 마신 학생들도 많았을 거다’ 이런생각에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청계천을 따라 한발짝씩 자리를 옮길때마다 성택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1978년 다른해 보다 더 싸늘했던 10월, 성택이는 태어난지 10년만에 처음으로 엄마와 ‘예술제 구경’(진주사람들은 그냥 예술제라고 함)을 갔다. 인파속에 혹시 아들을 잃어버릴까봐, 엄마를 잃을까봐, 엄마는 성택이 손을 성택이는 엄마손을 꼭 잡았다. 엄마손이 왜 이렇게 따뜻하지 하는 궁금증을 안고 성택이는 엄마와 함께 진주성안 촉석루에 올랐고 남강변을 따라 걸었다. 유등이 띄워진 곳에 멈춰선 엄마는 두손을 살며시 합장하며 ‘우리 아들 건강하게 해 주시고 집안 두루두루 평온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합장하는 잠시 사이 손이 시러웠다. 그해 음력 10월26일 엄마는 더 이상 촉석루도 남강도 유등도 볼 수없는 곳으로 가셨다.
성택이의 개천예술제, 진주성, 촉석루, 남강, 유등은 가슴속에 새겨진 잊지못할 추억이고 낭만이며 슬픔이다. 이날 성택이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서울 청계천에서 열린 마지막 등축제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가벼운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내년에는 진주에 꼭 가봐야지 하며…
#2013년 8월15일 광복절, 성택이는 모처럼 고향친구들과의 모임에 참석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며 시간가는줄 몰랐다. 한 잔 두잔에 홍조를 띈 얼굴의 규석이가 갑자기 “서울시가 남강 유등축제를 모방한 서울등축제를 2012년까지 하기로 해놓고 올해 또 한다고 하는군. 그래서 지금 진주에서는 서울등축제를 중단해야 한다고 난리라고 하는데 친구들 어떻게 생각하노”라고 질문을 던졌다. 또 “진주에서 반발을 하니까 서울시가 청계천 상인연합회 등 민간에게 위탁해버린다고 하는데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규석이는 친구들의 의견이 대단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친구들 대부분은 서울등축제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는 분위기 였다. 그러나 그중 일부 친구들은 “무작정 서울시에게 중단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우선 아닐까” 또는 “진주 유등축제는 서울시가 베낄 수 없는 역사성이 있잖아. 아무리 모방할려 해도 힘들껄”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규석이는 “생각해 봐라. 인구 1000만 서울시가 뭘 못하겠노, 돈으로 밀고 힘으로 밀면…. 진주에서 서울등축제 하지 말라고 하니 서울시가 뭐라했노. 유등축제는 보편적 축제여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고 진주가 반발하는데 계속 그러면 법으로 하겠다고 했지. 또 노이즈마케팅 운운하며 등축제를 놓고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고 용서를 구하면 아량을 베풀겠다고 했잖아. 정치적이라는 단어는 서울이 먼저 사용했고 누가 용서를 구해야 할지 참 적반하장도 유분수 아이가”. 규석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진주시가 서울등축제 반대운동에 5억원을 편성하자 서울시에서 당황했다고 하는데 일이 커지자 서울시가 내년에는 청계천 상인들과 함께 사단법인인 ‘서울등축제조직위원회’를 만들어서 민간단체들이 등축제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라는데 참 어처구니 없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성택이는 “진주시장이 서울시장한데 TV공개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던데 차라리 양 시장이 공개적으로 툭 터놓고 얘기해보면 될 거 아닌가”라고 묻자 규석이는 “그게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하는데 무슨말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간다”라고 말했다.
이날 친구들은 서울등축제와 관련한 얘기들로 밤새는줄 몰랐다. 결국 ‘양 시장이 만나 해결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결론아닌 결론을 내린데 이어 서울시의 얌체대응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고향 진주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일심동체였다.
# 20살에 고향 진주를 떠나 26년째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성택이는 지난해 가을, 청계천을 찾았다. 한국방문의해 마지막 서울등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오색찬란한 등을 보면서 성택이는 어린시절 고향 진주 남강변에 떠 있던 유등을 떠 올렸다.
촉석루 아래 남강변에 형형색색 뽐을 내던 유등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무더위 속에서도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등을 만들던 기억, 완성된 등을 이동시켜 남강위에 띄웠을때의 환희, 다른 학교보다 더 잘만들어야지 하고 오기심이 발동했던 그 시절이 선명하게 떠 올랐다.
‘70~80년대 진주에서 학교를 다닌 학생이라면 10월 첫째 주 최소한 1주일은 공부고 뭐고 다 싫었을 것이고 이때 처음 술을 마신 학생들도 많았을 거다’ 이런생각에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청계천을 따라 한발짝씩 자리를 옮길때마다 성택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1978년 다른해 보다 더 싸늘했던 10월, 성택이는 태어난지 10년만에 처음으로 엄마와 ‘예술제 구경’(진주사람들은 그냥 예술제라고 함)을 갔다. 인파속에 혹시 아들을 잃어버릴까봐, 엄마를 잃을까봐, 엄마는 성택이 손을 성택이는 엄마손을 꼭 잡았다. 엄마손이 왜 이렇게 따뜻하지 하는 궁금증을 안고 성택이는 엄마와 함께 진주성안 촉석루에 올랐고 남강변을 따라 걸었다. 유등이 띄워진 곳에 멈춰선 엄마는 두손을 살며시 합장하며 ‘우리 아들 건강하게 해 주시고 집안 두루두루 평온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합장하는 잠시 사이 손이 시러웠다. 그해 음력 10월26일 엄마는 더 이상 촉석루도 남강도 유등도 볼 수없는 곳으로 가셨다.
성택이의 개천예술제, 진주성, 촉석루, 남강, 유등은 가슴속에 새겨진 잊지못할 추억이고 낭만이며 슬픔이다. 이날 성택이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서울 청계천에서 열린 마지막 등축제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가벼운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내년에는 진주에 꼭 가봐야지 하며…
#2013년 8월15일 광복절, 성택이는 모처럼 고향친구들과의 모임에 참석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며 시간가는줄 몰랐다. 한 잔 두잔에 홍조를 띈 얼굴의 규석이가 갑자기 “서울시가 남강 유등축제를 모방한 서울등축제를 2012년까지 하기로 해놓고 올해 또 한다고 하는군. 그래서 지금 진주에서는 서울등축제를 중단해야 한다고 난리라고 하는데 친구들 어떻게 생각하노”라고 질문을 던졌다. 또 “진주에서 반발을 하니까 서울시가 청계천 상인연합회 등 민간에게 위탁해버린다고 하는데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규석이는 친구들의 의견이 대단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친구들 대부분은 서울등축제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는 분위기 였다. 그러나 그중 일부 친구들은 “무작정 서울시에게 중단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우선 아닐까” 또는 “진주 유등축제는 서울시가 베낄 수 없는 역사성이 있잖아. 아무리 모방할려 해도 힘들껄”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규석이는 “생각해 봐라. 인구 1000만 서울시가 뭘 못하겠노, 돈으로 밀고 힘으로 밀면…. 진주에서 서울등축제 하지 말라고 하니 서울시가 뭐라했노. 유등축제는 보편적 축제여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고 진주가 반발하는데 계속 그러면 법으로 하겠다고 했지. 또 노이즈마케팅 운운하며 등축제를 놓고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고 용서를 구하면 아량을 베풀겠다고 했잖아. 정치적이라는 단어는 서울이 먼저 사용했고 누가 용서를 구해야 할지 참 적반하장도 유분수 아이가”. 규석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진주시가 서울등축제 반대운동에 5억원을 편성하자 서울시에서 당황했다고 하는데 일이 커지자 서울시가 내년에는 청계천 상인들과 함께 사단법인인 ‘서울등축제조직위원회’를 만들어서 민간단체들이 등축제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라는데 참 어처구니 없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성택이는 “진주시장이 서울시장한데 TV공개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던데 차라리 양 시장이 공개적으로 툭 터놓고 얘기해보면 될 거 아닌가”라고 묻자 규석이는 “그게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하는데 무슨말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간다”라고 말했다.
이날 친구들은 서울등축제와 관련한 얘기들로 밤새는줄 몰랐다. 결국 ‘양 시장이 만나 해결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결론아닌 결론을 내린데 이어 서울시의 얌체대응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고향 진주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일심동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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