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에 대하여
인연에 대하여
  • 경남일보
  • 승인 2013.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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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희지 (소설가)
풍년입니다. 산과 들이 꼭꼭 여물었습니다. 그 뿐인가요? 드높은 하늘은 무명수를 놓은 듯 수수하면서도 비단수인 듯 눈부십니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요. 우리는 아마도 전생에 헤아릴 수 없는 선업을 닦은 모양입니다.

저는 요즘 ‘인연’이라는 단어가 참 좋아졌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잠이 들 때까지 만나고 스치고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인연이라는 생각에 닿으면 하루가 그대로 축복입니다.

우주라는 무한 공간 안에서 그것과 내가 닿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량한 인연인가요. 나부끼는 바람결에 서로의 머리칼이 스치고, 걸음과 걸음이 스며 옷깃이 닿고, 말과 말이 섞여 웃음이 피는 인연은 참말 귀하고 소중합니다.

이런 인연들을 저는 참으로 오래 외면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내 삶의 전부는 ‘글’이라고 마음을 단단히 걸어 맨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토록 갈구해마지 않던 ‘글’과의 불같은 연애에 나는 과연 성공 하였는가, 라는 자문 앞에서는 꿈속인 듯 아득해져서 마음이 흩어지곤 합니다.

12연기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모두 그 원인이 있다는 불교의 기본 원리입니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는 이 설에 따르면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폭력에는 또 다른 폭력이라는 씨앗이 있고, 실천되고 있는 사랑 역시 다른 이에게서 받은 사랑이라는 씨앗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도 이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지금 모습을 보면 전생에 내가 한 일을 알 수 있고, 지금 하는 일을 돌아보면 후생에 내 모습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고요.

저는 제 눈물에게 말없이 손수건을 내밀었거나, 제 철없는 웃음에 손뼉을 쳐 주었거나, 제 어리석은 분노에게 자장가를 불러주신 수많은 인연들을 불러 이제야 마음 한 자락 선물하려 합니다. 풍성하고 찬란한 이 가을이 진심으로 당신들의 것이기를. 그러면 그 축복이 또 다른 축복을 낳아 우리 사회가 이 가을처럼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여고 졸업식 날 겁도 없이 나이트에 갔다가 만난 사람에게 혼이 날 뻔했던 절 구해주셨던 중국집 배달원 아저씨,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홍수에 불은 물살에 휘말렸을 때 몸을 던져 구해주신 우체부 아저씨, 날치기에게 핸드백을 뺏겨 털썩 주저앉은 제게 차비를 주며 가방은 곧 돌아올 거라 위로해 주시던 미소가 인자했던 아주머니, 첫사랑을 떠나보낸 겨울 어느 날 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어주던 친구……. 인연을 넘어 구세주라 해도 넘치지 않을 당신들과의 인연이 있어 이 가을이 더욱 풍요롭습니다. 고맙습니다.
최미희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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