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이야기> 농군의 전쟁
<농업이야기> 농군의 전쟁
  • 경남일보
  • 승인 2013.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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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조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관)
참으로 무덥고 긴 여름 이었습니다. 잠시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수건을 둘러쓰고, 주말이면 가족 찾아 고구마 밭 땅콩 밭으로 전쟁 같은 일을 나갑니다.

땀에 눈이 시려도, 햇살에 볼이 뜨거워 수건을 더욱 감쌀 수밖에 없는 사정을 잘 아시지요?

그리곤 뙤약볕을 피해 새벽 농사도 나갑니다. 어스름한 새벽, 아직 풋내기 농사꾼이라 해뜨기 전에 나가야지 하면서도 뜨이지 않는 눈을 비비며 나갑니다. 벌써 들판엔 부지런한 농군들이 많이 보입니다.

경운기 들리며 약을 치고 고랑마다 엎드려 풀매기를 하는 농군들의 전쟁을 아시는지요? 자연과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습니다. 저의 눈에 농민은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전사들입니다.

초보 농군인 저 이등병의 전투기를 잠시 전합니다. 지난봄, 100여평의 대밭을 밭으로 만들려고 대를 베었습니다. 톱을 세 개나 부러뜨리며 수백그루의 종아리만한 대를 베어 내었지요. 툭 트인 전망과 함께 넓은 밭이 생겨 행복했습니다.

새 죽순이 올라오면 간단히 뽑아주면 될 터이니까요. 이것이 이등병의 멋모르는 전쟁의 시작입니다.

오월이 되어 처음엔 종아리만한 죽순을 웃으며 두어번 뽑았지요. 그랬더니 이번엔 팔목만한 죽순이 올라옵니다. 발로 툭툭차며 역시 두어번 부러뜨렸지요. 드디어 죽순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굵은 손가락만한 대가 바로 치고 올라옵니다.

처음엔 작은 대나무다 싶어 방심했었지요. 그런데 이놈들은 장마를 만나자 죽순에 비해 숫자도 수배로 불어나고 가지를 엄청나게 뻗어낼 뿐만 아니라 키도 겁나게 빨리 자랍니다. 이번엔 손이나 발로는 부러지거나 뽑히지도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톱과 낫으로 두어번 베어내었지요. 그랬더니 보란 듯이 새끼손가락만한 대가 수도 없이 고개를 내밉니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엔 톱날예초기를 동원하여 풀 베듯이 베어 보았지요.

그랬더니 이놈들이 숫자는 비록 작아졌지만 이번엔 대가 올라오지 않고 바로 대나무 잎만으로 된 정강이 높이의 수풀이 군데군데 무성하게 생겼습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이를 악물고 또 예초기로 베었지요. 또 다음이라 하기엔 미안하지만.

정말로 다음엔 발목높이로 앙증맞은 토끼풀처럼 예쁘장한 대 풀이 올라왔습니다. 이정도면 되었다 싶었지요. 며칠 후 정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번엔 그 대 풀 사이에서 향나무처럼 지그재그로 크면서 마디마디에 소담스런 잎을 이고 자라납니다. 기나긴 여름더위도 끝나가고 마침내 아침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지만 아직도 곳곳에 젓가락 같은 대가 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보다, 곡식을 키우는 농부에게 있어 풀과의 전쟁, 벌레와의 전쟁은 더욱 지독하답니다.

퇴직을 앞둔 예비 농사꾼은 풀을 베고 일주일후 주말에 다시 와보곤 깜짝 놀랍니다. 부부싸움해가며 심고 키운 콩대와 고추대는 어디가고 풀만 무성하니 늙은 신랑각시는 어찌할 바를 모를 밖에요.. 머리 좋은 사람, 언변 좋은 사람, 돈 많은 사람들 많지만, 새벽어둠을 헤치고 나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인간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과도 같은 농사일을 하면서도 결코 포기할 줄 모르는 농군들이야 말로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생명의 근본을 일구어 가는 농군들이, 어찌 병을 고치는 의사만 못할 것이며, 정치를 하는 의원들만 못할 것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만 못하겠습니까. 화려한 호텔이나 양주집에서 팁을 주며 행복을 사는 사람도 있다지만, 천원에 막걸리 한통 사들고 김치전에 이웃들과 정겹게 인사 나누는 농군들의 진정한 슬픔과 행복을 아십니까?

꾀부릴 줄 모르며 세상살이에 둔하고,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좋은 것 해줄 돈이 없어 가슴 아파도, 이웃과 같이할 줄 아는 검은 얼굴에 순박한 농군들이 진정 존경받아야 할 분들입니다.

푸르던 단풍나무 끝 부분이 빨갛게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참외와 수박, 포도와 붉은 고추 수확도 끝나 가지만, 키위는 주렁주렁 달려 풍성한 가을을 예고하고 있으니, 추수할 땅콩과 고구마도 곧 캐러 가야지요.

그리곤 찬바람 일면 황금으로 넘실될 저 푸른 들판으로 허수아비 찾아 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최용조 (경상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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