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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받는 지도자로 돌아온 축구천재<경남축구열전> 박양하 경남FC 2군코치
박성민  |  smworld17@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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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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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같은 사람도 인터뷰가 될까요” 박양하(52)감독 첫 마디였다. 비운의 축구천재, 방랑벽, 항상 그를 따라다는 수식어는 곱지만은 않았다. 언제나 천재성과 비교되며 짦은 선수생활로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그를 만나 그동안 하지 못했던 속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 천재 미드필더의 탄생

초등학교 2학년부터 동네에 공을 가지고 놀았던 박양하는 5학년이 되자 마산합포초등학교로 전학해 본격적인 축구와의 인연을 맺게된다.
마산 중앙중을 거쳐 창신공고(현 창신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놀라운 패싱력과 게임 조율능력, 공격본능으로 천재 미드필더의 탄생을 예고했다. 하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하늘이 시샘 했을까.
박양하는 고교 2학년 때부터 결핵성 늑막염을 앓으며 축구인생 첫 시련이 시작된다.
“지금도 기억해요. 의사는 공을 차면 죽는다고 그랬어요. 늑막에 물을 빼는 시술을 해도 숨이 차 올랐고 결국 약물로 늑막유착을 시켰어요. 지금도 왼쪽이 크죠”

축구를 시작한 만큼 성공하겠다는 목표가 강했던 박양하는 몸이 아픈 가운데서도 고교 2학년, 강릉 추계연맹전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당연히 대학과 실업의 스카웃 제의가 이어졌고 그토록 원했던 고려대에 입학한다.
“어찌보면 고3 시절이 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스카웃 제의도 많이 받았지요. 포철이나 연세대쪽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 제가 고려대를 선택했습니다”
 
이후 청소년 대표팀 추가 선발과 대학 1학년 때 한·일 정기전 대표팀 선발 후에도 다시 늑막이 제 기능을 못하며 대표팀과 인연이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데 어린마음에 이제 됐구나하는 안도감과 건방진 마음이 있었던것 같아요. 아쉽죠”
 
◇ 방황…그리고 힘겨웠던 선수생활
축구를 하기 어려운 몸이었지만 천부적인 재능마저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대 재학 시절 고연전에 나서 4-0 대승을 이끄는 등 녹슬지 않은 기량을 뽐냈다.
결국 박양하는 1986년 대우로얄즈에 계약금 4000만원, 연봉 2400만원 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당시 대우는 정해원, 이태호, 변병주, 조광래, 박창선 등 국가대표들로만 구성된 리그 최고의 팀이었다. 그럼에도 데뷔전 부터 그는 주전으로 경기에 투입됐다.
현대와의 개막전과 럭키금성전에 잇따라 출전하며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역시 부상과 지병인 늑막염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실 저는 그 몸으로 운동을 많이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였습니다. 그 가운데 속 사정을 말할 수는 없었고 지도자 분들은 엄했죠. 돌이켜보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 방황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 그의 마음을 유일하게 알아준 이가 바로 김호 감독이었다. “감독님은 제가 몸이 아프다는 걸 아시는 분이셨죠. 동래고 감독 시절부터 봐주셨구요. 지금도 연락을 항상 드리고 가장 존경하는 분이세요”

한편, 겨울 스토브리그가 되면 언론은 연일 ‘또 방랑벽’ ‘돌아온 축구천재’ ‘재기 가능할까’등의 제목을 뽑아내며 그를 몰아세웠다.
“저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봐요. 다른 분 들은 아픈다는 것이 핑계로 들릴 수 밖에 없었을 거에요. 사람 사정을 다 모르니까요. 저는 그래도 나름대로 선수생활을 6년 동안 잘 버텨냈다고 생각하죠”
대표상비군 청룡팀을 거친 박양하는 국내 은퇴 후 90년 일본 2부리그 ACM으로 건너가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 진정한 지도자는 유소년 축구부터
은퇴 후 박양하는 울산 전하초등학교 감독에 부임하며 지도자 생활에 첫 발을 내딛는다. 그 때도 김호 감독과 앞으로 진로에 관해 의논하며 지도자 수업을 쌓게된다.
“김 감독님은 우리 축구가 기술적인 부분이 더 발전하고 많아져야 한국축구가 나아갈 수 있다고 보셨어요. 저 같은 스타일 축구를 하는 선수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하셨죠”

진정한 지도자는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진 그는 울산 전하초교를 시작으로 거제중학교 창단감독을 맡으며 1년 6개월만에 전국대회 2관왕을 달성한다.
이후에는 대우로얄즈 코치와 부경대 감독을 역임하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갔다. 부경대를 시절에는 20명 남짓 부족한 선수층에도 전국대회 예선탈락은 1번에 지나지 않았고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를 3번이나 꺾는 등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동아대와 동의대 등 부산의 대표적인 팀을 꺾고 2005년 전국체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분에서는 그 누구한테도 질 마음이 없었어요. 특히 초등학생, 중학생을 가르치면 보람을 느끼고 너무 좋아요. 지금도 창원축구센터에 가서 아이들이 공차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이쁘고 기특하진 모르겠어요” 경남지역에서 주로 지도자생활을 한 그는 김해시청 창단 감독도 경험하며 팀을 반석위에 올려놨다.

그는 지도철학에 대해 “지도자를 하면서 선수들과의 믿음,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변했으니까요. 저도 서로 신뢰를 쌓아가는 노력을 해야죠”라고 소견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직도 고향 시골분들이 축구로 인해 기억해 주시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면서 말을 맺었다.
 
박양하는
출생= 1962년 5월 28일 경남 마산
학교= 마산 합포초교-마산중앙중-마산 창신공고-고려대학교
선수경력= 청소년 대표, 국가대표 상비군 청룡, 대우로얄즈(1986~1990), 일본ACM(1990)
지도자경력= 울산전하초 감독(1993~1994), 거제중 감독(1995~1998), 대우로얄즈 코치(1999), 부경대 감독(2001~2006), 김해시청 감독(2008~2009), 경남FC 2군 코치 겸 스카우터(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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