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배틀
상처 배틀
  • 경남일보
  • 승인 2013.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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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지 (아동복지전문기관 홍보담당)
대학시절, 방학만 되면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가 있었다. 미니홈피에는 ‘유학 간다’는 한 마디만 덩그러니 떠 있고 언제 떠나는지, 목적지는 어디인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문제는 개강하고 학교로 돌아가면 그녀가 홀연히 돌아와 있었다는 점인데, 알고 보니 유학 같은 건 가지도 않았던 거다. 그녀의 거짓말은 패턴을 바꾸어 방학마다 반복되었고, 나는 그 거짓말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이것이 참말일까를 의심하게 될 즈음 나는 그녀와 자연스레 멀어졌던 것 같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해 왔다. 대체로 모든 순간 솔직했으며 내 이야기를 조잘조잘 꺼내놓는 것으로 친분을 표현하는 나에게 그녀는 좀 서운한 존재였다. ‘나는 너에게 마음을 열었는데 너는 왜 내게도 거짓말을 하는가. 그리고 왜 나에게 숨기는 것이 아직도 많은가.’ 당시엔 그런 생각들로 단단히 억울했던 것 같다.

언젠가 드라마 속에서 “나는 너한테 감정의 쓰레기통 정도였잖아. 나는 네가 쏟아내는 감정과 생각들을 때론 듣고 싶지 않아도, 궁금하지 않아도 들어야 했어.”라는 대사를 마주하고 나는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덕이라 여겼던 나의 솔직함이 누군가에겐 부담이었을지도, 상대가 자신을 꺼내놓을 틈을 주지 않았던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분하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털어놔야 했고, 전화를 걸 곳이 마땅치 않으면 외롭다 느끼며 슬퍼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쓰레기통을 쥐어주고 내가 버리고픈 감정과 기억들을 받아달라고 응석을 부렸던 걸까.

대학 동기 중 한 명이 집들이에 초대를 해왔다. 아기는 얼마나 자랐는지, 엄마가 된 친구는 얼마나 행복한 얼굴인지 보고 싶었다. 한데 문제의 그녀가 집들이에 참석하겠다고 선수를 치는 바람에 나는 어이없게도 불참을 선언해 버렸다.

나는 이제 어렴풋이 그녀를 이해한다. ‘유학 간다’는 글에 내가 어디로, 언제 떠나느냐고 연락이라도 했다면, 송별회도 없이 가는 건 말도 안 된다며 서운해 했다면 그녀는 내심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우린 둘 다 외로움을 경계했던 거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했던 거다. 알면서도 나는 왜 집들이에 불참하면서까지 그녀를 피해야 했을까. ‘누가 더 상처받길 두려워하나’라는 주제로 미성숙한 배틀 중이던 우리의 관계에서 내가 한 번 더 진 거다. ‘민지는 왜 안 오냐고 걔가 묻더라.’ 동기의 전언을 듣고도 용기 내는 걸 두려워한 거다. 다음 번엔 내 차례인 것 같다. 실은 이미 알고 있는 그녀의 바뀐 전화번호로 연락을 하는 것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시작 같단 느낌이 든다.

강민지 (아동복지전문기관 홍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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