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리의 가을
평사리의 가을
  • 경남일보
  • 승인 2013.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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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진환 (경남은행 남진주지점장)
가을이 내려앉는다, 빛깔 바람 소리로 온 세상에 스며든다. 가을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비경이라 누군가 수식어를 붙이면 필요 없는 덧칠을 한 것 같아 왠지 싫다.

발길 닿는 곳, 바람이 지나는 곳, 햇살이 영그는 곳의 가을은 다 똑같은 자연의 선물이겠지만 나는 유독 하동 악양 평사리의 가을이 좋다. 지리산 남쪽 끝 봉우리인 형제봉이 남쪽 쪽빛바다를 보면서 울을 치고, 전라북도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212㎞를 내달려 심연의 남해바다에 다다르기 전 살포시 내려 놓은 평사리 들판. 드넓은 평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옹색하지도 않은 평사리 들판. 이곳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 낼 것도 같은, 세상의 모든 것을 내어 줄 것도 같은,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곳에 와 있는 느낌을 준다.

지형의 아름다움만이라면 평사리 못지 않은 곳이 또 없으랴. 그곳은 지형의 아름다움에 더하여 한국 현대문학의 거장 박경리 선생께서 25년에 걸쳐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의 시작과 끝이니 평사리의 가을은 가을의 으뜸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선생의 토지는 구한말부터 광복되는 그날까지 등장인물 600명이 50년의 세월 동안 평사리에서 출발 진주, 통영, 부산, 서울, 일본, 중국(간도)을 넘나들며 식민지 시대를 꿰뚫어 우리 민족의 한과 인류의 생명사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언젠가 선생의 생전에 텔레비전의 어느 대담프로에 나와 진행자가 ‘토지’ 속의 시간, 공간, 사람이 그렇게도 방대한데 어떻게 엉퀴지 않고 완벽하게 풀어냈는지를 물으니 선생께서 시작은 본인이 하였으나 어느 순간 소설 속의 인물들 스스로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 완간하였다는 내용으로 답하시는 것을 보았다.

근간에 하동에 갈 일이 있으면 시간을 내어 평사리를 들렀다 오곤 하는데 평사리에 가면 선생의 그 말씀이 울림으로 전해올 뿐만 아니라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 것 같다. 소설 ‘토지’는 작가 개인이 쓴 픽션이 아니라 이 땅의 동시대 양반, 하인, 농민, 천민 모두의 한이 선생의 손끝으로 환생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자 하셨다는 것을, 가을이 다 영글어 꼭지만 남기기 전에 서둘러 그곳에 들러야겠다. 최참판댁 마당에 서서 대나무 잎에 이는 바람에도 넘실대는 들판의 잘 익은 황금물결 너머 이미 산 능성이에 걸쳐진 태양만으로도 은빛을 드러내는 섬진강 백사장 모래와 수정 같은 섬진강 물빛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 평사리가 아닌 토지의 시작인 1897년에 서 있는 느낌을, 그것도 소설이 아닌 살아 숨쉬는 사실의 중심에 있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가을은 떠남을 부추긴다, 작게 이는 바람에도, 낮게 드리우는 석양에도 일상에서 벗어나 어딘가 한번은 휘 둘러보아야 할 것 같은 충동을 준다. 이 충동을 채워 주기에는 평사리가 최적이 아닐까 한다, 시간이 허락하면 ‘토지’를 읽고 난 후 평사리의 가을을 한번 보면 매년 가을 열병과도 같이 평사리를 찾지 않을까 싶다.

차진환 (경남은행 남진주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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