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0)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0)
  • 경남일보
  • 승인 201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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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김상훈 시비와 거창문인들(1)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0)
<31>김상훈 시비와 거창문인들(1) 
 
오랜만에 거창행을 결심하고 홍시인과 함께 출발했다. 제1목표는 거창 가조면에 세워져 있는 ‘김상훈 시비’를 보는 일이고, 제2목표는 거창의 문인들에 대한 자료수집에 관한 일이었다. 거창에 도착하여 스포츠파크에서 표성흠 시인 겸 소설가를 만나 그 다음 행보를 정했다. 우선 가조면으로 가서 광복공간의 시인 김상훈의 시비를 보기로 했다. 12시에 진주에서 출발했으므로 거창에는 1시에 도착, 일단 표시인의 차로 합승해 가조면으로 들어섰다. 시장통 안으로 들어가 묵밥집에서 점심을 때우고 눈이 띄는 순간 표시인의 손에서 밥값이 해결되고 있었다. 어째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면소재지는 마상리이고 우리가 가는 곳은 그 이웃 일부리 온천지구다. 사방이 의상봉(1046m), 장군봉(950m 가조의 진산), 미녀봉(930m), 오도산(1134m)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중앙부에는 가천을 중심으로 평야가 발달한 분지 형태의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필자는 처음으로 가조면에 발을 들여놓지만 정감록에 나오는 도읍설에 대해 마음이 찍혀 있어서 산과 들녘과 작은 냇물을 예사로이 볼 수 없었다. 무슨 ‘錄’이니 ‘秘記’니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사람이 보는 산세가 특이한 것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가 있어서이다.

그런데 필자는 어째 이 분지가 아늑하고 봉우리들이 엎드려 내리는 양을 보면서 처갓집이 있는 동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미녀봉이 처녀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음기 같은 것이 서리는 느낌이 일었다. 아름답기는 아름다운 분지임에 틀림이 없었다. 표시인이 거창에서 이리 좋은 데가 다시 없다 하고 참 아름다워요, 하고 자화자찬(?)하는 것이 그것으로 예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표시인이 거명하는 관광 명소는 고견사(古見寺), 수포대, 다천서당(茶川書堂) 등이었다. 그중 다천서당은 이미 필자의 귀를 사로잡고 있었다. 한말 애국지사인 면우 곽종석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유림들이 세운 서당이었기 때문이다. 면우선생은 구한말 산청 단성에서 태어나 나라가 넘어지는 소식과 더불어 살아 있다는 일이 부끄러워 은둔지를 찾다가 정신 없이 들어간 곳이 거창 가북면 중촌 다전리였다. 면우선생은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했는데 1919년 4월 한국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를 보낸 것이었다.이 운동은 그의 문인들인 김창숙, 김 황 등과 더불어 진행했는데, 이 일로 선생은 일제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그해 6월에 가북 다전으로 돌아왔으나 여독으로 8월에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2년후 면우선생을 기려 유림들이 가조면 장기리 원천마을에 다천서당을 세웠다. 면우선생이 가북면으로 은신해 올 때 그의 문인들이 동행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추강 김정수였는데 그분이 김상훈 시인의 생가에 있는 현판 글씨를 썼다.

우리는 이런 저런 사연들을 이야기하며 김상훈 시비 앞에 닿았다. 시비는 공원지구로 아직 개발이 덜된 곳을 골라 세워져 있었다. 부산 경남지역문학회가 잔심부름을 떠맡고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를 비롯해 관심 있는 단체 회원들이 도움을 주어 김상훈시인 현양사업을 시작했는데 그 첫사업으로 시비 건립을 보게 되었다.고향 일부리 주민들, 가조온천조합, 거창군과 의회, 거창예총과 문협을 비롯한 지역민들 그리고 장남 김종철을 중심으로 한 유족들의 뒷받침이 힘이 되었다.

새겨진 작품은 ‘종다리’였고 일을 주도한 이는 경남대 박태일 교수였다. 건립위원장에는 울산이 낳은 대표적인 광복열사 박상진 선생의 손자 박종해 시인이 맡아 후면 비명을 지었다. 새겨진 시 ‘종다리’는 초기시편으로 다음과 같았다. “금실바람 은실바람/ 노랑꽃잎 향내 묻어/ 아지랑이 아지랑이 / 봄은 자꾸 가자는데 // 떴다! / 종다리/ 불길 같은 울음소리/ 넋이 소리되어/ 하늘이 가득 우는 소리// 청춘을 못다 산/ 이 골안 젊은이의/ 피맺힌 그날의/ 한많은 사연인가// 보리고개 넘다가/ 통곡을 하던/ 강마을 어머니의/ 기나긴 설음인가// 못배겨/ 못배겨/ 안 울고는 못배겨/ 내일을 불러서 / 몸을 태우는// 종다리, 아아/ 갈망의 새야!/ 봄은 가자는데 / 너만 우느냐”

이 시에서는 종다리의 피맺힌 울음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것을 알아내면 시의 목표에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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