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과 서재필
독립문과 서재필
  • 경남일보
  • 승인 2013.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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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 (객원논설위원)
‘성났다 번났다/ 연주문을 열어라/ 호박 국을 끓여라/ 너 먹자고 끓였나/ 나 먹자고 끓였지/ 입이나 딱딱 벌여라/ 열무김치 들어간다.’ 이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서울을 비롯한 경기지방 아낙들이 어린이를 달래면서 부르던 ‘연주문’ 민요이자 우리민족의 원한이 맺힌 중국에 대한 참요(讖謠)였다.

▶세종 때 돈화문 밖 서북쪽에 모화관(慕華館)을 지으면서 건물 앞에 홍살문을 세워 연조문(延詔門)이라 했다가 중종 34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의 권유로 영은문(迎恩門)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이 문을 통해 한양으로 입성했고, 아름다운 조선 처녀들이 이 문을 거쳐 중국으로 끌려 갔다. 세상 사람들은 이 문을 통상 연주문이라 불렀다.

▶독립협회의 서재필 박사가 영은문을 헐어내고 프랑스 개선문을 본뜬 높이 14.28m, 너비 11.48m의 독립문을 세웠다. 건설자금은 독립협회의 모금운동으로 충당했다. 당시 1500만 우리민족이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한다는 소극적인 개념을 넘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했다. 지금의 독립문은 1979년 금화터널을 뚫으면서 원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옮겨 세운 것이다. 독립문 뒤에 5m 높이의 영은문 주초석 2개가 남아 있다.

▶서재필은 18세 때 별시문과에 합격해 갑신정변에 참가했다가 3일 천하로 정변에 실패하자 해외로 망명했다.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했고 동생은 참형됐으며,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서재필의 고향 전남 보성군 문덕면에 독립문 모형이 세워져 있다. 지금 온 산하는 단풍으로 물들어 이른바 천자만홍의 계절이다. 올곧게 살다간 선인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박동선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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