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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3)<34>김상훈 시비와 거창 문인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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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6: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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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3)
<34>김상훈 시비와 거창 문인들(4) 
 
전기수 시인은 2003년 6월 11일 지병으로 향년 76세로 영면했다. 유족은 부인 신군남씨와 장남 병호(재미), 차남 완(고교 교사), 장녀 영희, 2녀 영경, 3녀 나미, 4녀 나리, 5녀 나나 등이 있다. 빈소는 부산 광한리 남천성당에 마련되었고 김해문인협회 회원들이 주로 영결식에 참여했다.

오하룡 시인은 도민일보에 ‘추모사’를 남겼다. 인용을 일부 해 본다.

“선생님은 평생 서정시만 쓰셨습니다. 선생님인들 시류를 의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선생님은 한 번도 옆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확고한 자연친화적인 선생님 나름의 철저한 본성의 발로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원고에 대해서는 참으로 엄격했습니다. 언제나 단아한 글씨로 완벽한 문장을 추구하였습니다.그만큼 선생님 원고는 깨끗하였습니다. 퇴임하신 후에는 깨끗한 문학상 하나 만드는 것을 소원하였습니다. 문학상을 염두에 두신 것을 보면 오늘날 대개의 문학상이 그렇듯 문학상에 문제가 많음을 인식하고 그 어느 상보다 공정하게 운영되는 상을 만들겠다는 염원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시인의 유택은 태어난 거창의 북상면에 있으니 그는 완벽한 거창 사람으로 자타가 공인하게 되었다. 북상면은 요즘 국제연극제가 열리는 수승대에서 십리쯤 안쪽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지역이다. 연극제나 수승대를 관광으로 간 문인들은 퇴계선생 이야기와 더불어 거창이 낳은 서정시인 전기수도 기억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기수 다음으로 나오는 거창 출신은 신중신(愼重信, 1941, 4, 20-)이다.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서라벌예대에 진학하기 전 재수 시절 1959년도 제10회 개천예술제 일반부에 참가하여 ‘人生讚歌’라는 제목을 조숙한 솜씨로 소화하여 장원을 차지했다. 백일장 장원자들이 대체로 조숙한 사람들인데 신중신도 재수생 시절에 일반부 장원을 차지했으므로 그 조숙한 대열에 포함된다.

“지구가 한결같이 저만치 궤도를 돌아야만 한다는 안타까움이나/ 바람이 허허롭게 스쳐만 가야하는 아쉬운 그것들에 비해서가 아니라/ 제 모습대로의 눈빛을 가지고/ 제 色身에 따라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어쩌다 나란히 걷고 있는 이가 있어 그의 옷깃이라도 여며 주고 싶은 때가 있고...../ 해바라기만치는 더 큰 보람을 지니고 꽃의 형상으로 태어난 것이/ 하나 열매 맺음도 없이 죽어갔을 때 우리들의 눈시울이 뜨거워 옴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西녘 놀빛 아래서 웃음이 굳어간 할머니 그 할머니의 마른 가슴에/ 손주새끼의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을 때/ 우리들의 핏줄은 永遠 속의 어느 순간 것이 아니라/ 어기찬 어느 강기슭에 융융히 살아 흘러가는 물살 같은 것일게다/ 원시의 계곡에서 생성된 바위가/ 지금은 조그만 바닷돌로 남아 갔지만/ 우리 할아버지의 모습이 웃음 어린 아가의 눈망울 속에 그대로 비쳐 있다면/ 저 숱한 별처럼/ 우리들도 永劫토록 피어날 것이여/ 조용한 일요일 오후 마음의 구김을 펴고/ 저토록 유구한 하늘을 보고 있는 순간은.../ 그리고 地標없이 밀려 다니는 구름이라도 보고 있으면/ 아 얼마나 복된 일인가”

백일장 작품이 그 주제를 십분 살리고 있기가 힘드는데, 재수생 신중신은 시상이 온당하고 일관된 흐름을 잡아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시상을 끌고 가고 있다. 제 색신에 따라 노래 부를 수 있는 인생, 열매 맺음도 없이 사라지는 나무에 대해 눈시울 뜨거워지는 인생, 할머니의 굳어가는 살결에 손주새끼의 보드라운 살결이 포개지는 인생 등 영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인생살이를 가슴 뿌듯이 그려내고 있다. 전통과 영원, 그리고 분복을 노래했는데 잠깐동안 써내는 즉흥시에 인생을 이만치 그려낼 수 있는 시인은 흔치 않을 것이다. 신중신은 그만큼 부모가 구존하고 형제와 가족이 원만한 데서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재수생이면 비관할 수도 있고, 비젼이 어지러운 시기일 수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착하고 안정된 서정에 언어 또한 중년 이상의 포즈를 취할 수 있었을까? 이 시에서 얼핏 떠오르는 시인이 설창수다. 그 무렵의 설창수는 일생 중에서도 인생론적인 바탕에 언어의 색감도 동양적인 것이었는데 혹 신중신은 설창수의 시를 섭렵했던 것은 이니었을까? 그 무렵의 설시인은 김광섭이나 모윤숙, 또는 구 상 시인의 정서에 싸여 있었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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