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사가 품은 매월당의 삶을 읽다
무량사가 품은 매월당의 삶을 읽다
  • 최창민
  • 승인 2013.1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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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선정 100대명산 <78> 만수산 성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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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의 안식처 무량사. 늦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이제 갓 5세가 된 한 아이가 왕궁에 초청된다. ‘장안에 영특한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세종의 귀에까지 전해지면서 사실 확인 차 왕이 그 아이를 궁궐로 부른 것이다. 그는 3세에 시를 쓰고 5세에 소학을 읽은 뒤 한시를 짓는 천재였다. 아이는 세종이 보는 앞에서 한시를 써 내려간다.

이를 지켜본 왕은 감탄하며 “훌륭하게 잘 키우라. 나라에 큰일을 할 수 있는 아이니…”라며 별호를 ‘오세(5세)’로 내렸다.

왕의 칭송에 고무된 그는 1447년(세종 29)13세에 맹자 시경 서경 주역을 공부하며 학업에 열중, 천재적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세종의 세상이 끝나면서 자신에게 끼칠 정치적 파고와 환란의 세상을 감지하지 못한 채….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한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생육신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단종복위를 추진하다 탄로 나, 거열형으로 찢겨 죽은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매월당이 지천명이 되던 해 어릴 적 세종과 만났던 ‘궁궐의 추억’을 시로 남겼다./황금 궁궐에 갔다/참 영물이라고, 봉황이 났다고 서로 말하고 보기도 했다/

그 다음 문장은 좋았던 추억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적었다. /어찌 알았을까. 집안 일이 결딴 나/쑥대강이처럼 영락할 줄이야/

천재 소리를 들었던 어린 시절과 지금의 낙망한 처지를 절묘하게 대비하면서 비탄한 심정을 적은 글이다. 이 비정한 심정의 발단은 약관을 넘긴 21세에 일어났다. 1455년(세조 1년), 이른바 ‘계유정난’이라 부르는 수양대군(세조)의 단군 왕위찬탈이었다. 이 사건은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 정난으로 매월당은 생명과도 같았던 책을 덮고 동가숙서가식하며 속리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 금수강산을 돌며 유적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매월당집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이 그것이다.

지금 당장 세상이 끝장난다 해도 부도덕한 세조정권에 빌붙지 않겠다는 꼿꼿한 선비정신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고 있었다.

천재이면서 천재적 의지가 안주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한 평생 세상을 떠돌며 영욕으로 점철된 삶을 선택해야만했던 고독한 천재…. 차라리 큰 인물의 세속에 대한 가여움이었으리라.

‘오세 김시습지묘’. 부여 땅 만수산 기슭 무량사 앞에 마지막 흔적이 부도로 남아 있다. 말년 한 몸 누일 곳은 다름 아닌 조용한 산사, ‘수와 양의 셈법이 부질없음’의 무량(無量), 만수산 기슭 절집이었다. 왕의 기대이자 그 자신 ‘오세의 꿈’은 앞산에 뜬 한 조각구름처럼 스러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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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 앞뜰 단풍
 
 

▲매월당의 안식처 만수산 산행은 무량사에서 출발한다. 오전 9시 40분, 일주문이 제대로다. 두 사람이 안아도 남음이 있는 큰 둥치의 기둥이 양쪽에 버티고 섰다.

‘만수산 무량사’ 편액에 발바닥 간지러운 재미가 있다. 흰 글씨로 쓴 글머리에 아주 작게 한반도 문양을 새겨 놓았다. 이 문양은 사천왕문 편액에도 찍혀 있다. 차우 김찬균의 글씨라고 한다.

왼쪽 교량을 건너고 꼬부랑한 길을 따라가면 절이 나온다. 사천왕문 계단에 올라서면 빛바랜 단층의 2층짜리 극락전이 무협영화 예고편처럼 장막이 열린다. 장중하면서도 고풍스럽다. 늘어진 소나무 아래를 지나 느티나무 옆으로 걸어가면 극락전에 앞서 석등과 5층석탑이 버티고 선다. 어디에 먼저 눈길을 줘야할 지 조급증이 생길 정도로 흥분된다. 규모면에서 여타 석탑을 압도하는 크기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양식이 적절하게 조화된 고려전기석탑이라고 한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비슷하게 생겼고 1971년 해체 수리했다.

‘극락전’은 겉보기에 2층 구조이지만 안에는 통으로 뚫려 있다. 국내에서는 흔치않은 형식의 건축물로서 무량사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모시고 있다. 조선 중기 양식이다.

매월당 영정이 있는 사당을 돌아 무량사를 걸어 나와 만수산 가는 길을 잡는다.

취재팀은 교량을 건 넌 뒤 무량사 옛터 옆, 시멘트 길을 따라 태조암으로 향했다. 태조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하는 막연한 기대는 다가갔을 때 깨졌다. 뒤뜰에 무지렁이 감이 가지에 달려 있고 옆에 빛바랜 세간살림이 보인다. 인근에 견훤유적이 있어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추측만 할 뿐이다.

새끼를 치고 떠난 빈 새 둥지 옆으로 ‘토 톡∼톡, 톡’, 오색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나뭇잎 떨군 수림을 울린다. 발밑에 밟히는 건 미끄러운 낙엽. 평탄하고 고즈넉한 길에서 낙엽은 운치가 있으나 된비알의 낙엽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미끄럽거니와 숨은 돌부리리가 있고 숨은 나무뿌리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등산객들이 낙엽 길에서 발을 삐었다는 사고소식이 종종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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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시비

황홀한 기분에 들뜬 나머지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어 각별히 안전산행에 신경써야한다.

10시 53분, 태조암에서 1km 올라선 구간 ‘비로봉 400m’ 이정표를 만나고 된비알은 계속된다.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 누워있는 사자의 안식처 무덤 하나. 항상 드는 의문은 왜 고생을 마다않고 사자를 예까지 올렸는가. 조금이라도 하늘 가까이 모시기 위함일까. 아니면 산자의 위안일까. 그래도 무덤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둥근 자연이다. 그 속에 우리 민족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자연이요, 우주요, 차라리 아름다움이다.

무덤의 상념 끝에 정적을 깨는 소리. 인부들이 간벌작업을 하는 기계톱소리가 만수산을 울린다.

11시, 능선을 지나 비로봉에 올라선다. 멀리 북동쪽에 성주산 장군봉에서 북서쪽으로 성주산 왕자봉까지 하늘금이 유장하다. 반대편 동북쪽 성태산까지 자연휴양림생태탐방로가 이어진다.

비로봉에서부터 전망대→만수산까지 산릉은 늦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낙엽이 쌓인 아름다운 길이다. 대지는 역암이 주류이며 중간에 구멍이 숭숭 뚫리거나 푹 푹 꺼진 곳이 나오기도 한다. 역암은 퇴적암의 하나로 큰 자갈과 작은 모래알갱이가 박혀 있다. 거기에다 폐광되면서 남은 채굴 갱도로 인해 지반침하가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다. ‘주의하라’는 노란 간판이 곳곳에 서 있다.

실제 이곳은 과거 석탄 채굴지였지만 경제적 가치상실로 폐광됐고 인근에 석탄박물관이 들어서 석탄채굴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팔각정 전망대를 지나 10분 만에 닿은 정상은 575m봉. 안내판에는 조루봉으로 돼 있다. 국토지리원이 설치한 삼각점이 있다.

만수산 정상은 조루봉에서 남쪽으로 30여분을 더 이동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사실 어디가 만수산 정상인지 헷갈린다. 보령에서 발간한 등산안내도에는 조루봉보다 더 낮은 499m봉이 만수산으로 기록돼 있다.

낙엽 쌓인 길, 능선의 끝이 보이면 무량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난다. 내려서면 칼라 풀하게 치장한 슬레이트 지붕의 만수리마을이 보인다. ‘명리의 길’을 버리고 생을 마감한 매월당, 그를 기리는 시비는 무량사 물길 건너기 직전에 세워져 있다.

‘성주사지’는 차량으로 20여분을 이동하면 나온다.

성주사지는 부여 지방 호족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의미로 세워진 ‘구산선문’의 대표 격. 신라 말 낭혜화상이 중창해 번성했던 큰 절이었다. 지금은 금당터 석탑 등 몇 개의 유물이 남아 있다. 최고의 보물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8호). 고운 최치원이 진성여왕의 명을 받아 낭혜화상의 일생을 기록한 기념비다. 5m짜리로 신라 탑비 중 가장 크다. 남포오석을 다듬어 5120자의 글을 새겼다. 우리고장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경주 봉암사지증대사비문 등과 함께 고운 최고의 걸작이다. 당시의 제도 문화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다음은 금당터 앞에 5층석탑, 그 뒤로 세개의 3층석탑이 가로로 배치돼 있다. 김은진 문화해설사는 “팁비는 국내에서 8번째 중요한 문화재라고 보면 된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다. 또한 절터에 네 개의 탑이 세워져 있는 것은 특이한 구조다”고 설명했다.

3시 20분, 산행 출발 5시간 40여분이 지난 시간 취재팀은 성주사터를 떠났다.

▲만수산은 부드러운 육산이다. 충남 보령시 미산면과 부여군 외산면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499m. 고려 말 정몽주의 ‘하여가’에 등장하는 만수산과는 다르다. 그 만수산은 고려의 수도 개경에 있는 송악산을 말한다.

▲산행은 무량사주차장→무량사일주문→무량사(돌아 나옴)→임도→무량사 구터→도솔암·태조암갈림길→태조암→능선갈림길→비로봉(반환)능선 갈림길→낙엽 길→만수산(반환·하산)→안부→김시습시비→무량사주차장. 대략 5km에 휴식시간, 성주사지 이동시간 포함 5시간이 소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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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산등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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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루봉에서 만수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낙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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