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린 토란대 15만원
말린 토란대 15만원
  • 경남일보
  • 승인 2013.11.2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영만 (위키트리 부회장)
“12번에 문제가 생겼다.” 87세 되신 어머니의 MRI 사진을 놓고 의사는 검은색을 띤 12번 척추부분이 내려앉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흘간이나 입원을 해야했고 이번에도 뼈 시멘트를 주입하는 수술이 행해졌다. 골다공증 증세가 있는 그의 척추수술은 이번이 세번째다. 수술을 한 곳은 괜찮은데 다른 마디에서 문제가 새로 생기는 식이다 .뼈가 자꾸 내려앉는다는 질문 아닌 질문에 의사는 환자중에 여덟번까지 수술을 한 사람도 있다며 웃었다.

자기한테 짐이 될까 봐서라도 노인의 건강을 본인보다 더 챙기게 마련인 며느리와 딸들은 아예 아무 일도 못하게 한다. 그런 압제 속에서도 그녀는 지난 봄 집앞 밭에 300포기 고추를 심었다. 토란과 메밀, 콩을 키웠고 김장용도 잊지 않았다. 농삿일은 이리저리 남의 힘도 빌리고 해서 넘어갔다. 화근은 메주를 쑨데 있었다. 콩을 가마솥에서 삶고 절구통으로 옮겨 뭉개는 어느 과정에선가 무리한 힘이 가해져 문제의 12번 마디가 협착되는 사고가 빚어졌던 것이다.

집안 시제(時祭) 전날인 지난 토요일 그녀는 앞서 두 번의 수술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하동 집으로 다시 무사 귀환을 했다. 허리를 못펴고 심한 통증을 호소하면서 동네사람들의 걱정속에 병원으로 옮겨진지 딱 보름째 되는 날, 의사의 기술이 마치 자신들의 공덕인 양 의기양양하게 고향집으로 시어머니를 호위했던 며느리들은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엄청난 배추밭 앞에서 숨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기어코 참지 못했다.

“어머니, 정말 농사 짓고 하시는 거 이젠 그만이에요. 제발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여기서 김장하는 것도 정말 올해가 끝이에요.” “그래라. 내년에는 심으래도 안 심을란다. 걱정 안 시키게 몸관리 하꼬마.”

늘어나는 수술 횟수만이 걱정이 아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온몸이 산산조각이라도 날 것처럼 위태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홀로 서려 한다. 도회지 아들 집에서는 시들시들 잠만 자는 데도 하동 집에서는 역동적인 생활인이 된다. 손자들은 “할머니는 시골만 가면 날라다닌다”며 신기해 한다.

며느리들이 김장하느라 부산한 사이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햇볕 잘 드는 밭 한쪽에 구덩이를 꽤 깊게 파게 하더니 창고에 있는 마대 두개를 묻어 달라신다. 토란뿌리다. 내년에 종자로 쓰려면 이렇게 흙속에 얼지 않도록 묻어두어야 한단다. 그는 어느새 내년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도 봄이 되면 퇴비를 농협에 주문할 것이고 고추모종도 또 밭가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이런 예측 어느 것도 고자질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농사를 짓다가 어느 날 밭가에서 갑자기 사그라지고 싶다는 늙은 어머니의 ‘자존’을 지지해서다. 필요하다면 척추수술을 여덟번까지도 해드릴 생각이다.

옥종농협 발행 ‘일금 15만원-말린 토란대’ 영수증이 마루에 굴러다닌다. 내년 가을에도 2014년 판 ‘말린 토란대 영수증’을 보고 싶다.

김영만 (위키트리 부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