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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실현시킨 열정의 사령탑<경남축구열전> 박항서 상주상무 감독
박성민  |  smworld17@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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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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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강등’

승부조작의 위기 속에 상무축구단은 최대 위기를 맞는다. 이미지는 한 없이 떨어졌고 설상가상 팀은 2부리그로 강제강등됐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2 월드컵의 영웅 ‘박항서’ 감독은 위기의 상주 상무를 이끌고 K리그 챌린지리그 초대 챔피언에 등극한다.


◇ 운명적인 축구와의 만남
경남 산청 생초면에서 태어난 박항서는 동네에서 공차기를 즐기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중학교 때 여타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던 박 감독은 형들과 누나들을 따라 서울로 진학한다. “원래는 축구나 공부를 하기위해서는 진주고로 진학해야 하는데 전부 형제들이 서울에 계셨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서울로 올라가게 됐다” 공부를 위해 고교시험을 치렀지만 운명은 그를 서울경신고로 이끈다. “경신고 1학년 2학기때 창문넘어 운동장을 보니 축구가 너무 하고 싶은 거에요. 그때 또 차범근 등 유명한 선배들도 있었거든요” 결국 박항서는 늦은 나이로 축구선수의 인생을 시작한다. 뒤늦은 시작에도 대학 1년부터 청소년 대표를 경험한 박항서는 3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 충무팀에 뽑혔고 4학년에 올라 대표1진 화랑팀에 합류했다. “그 때 함께한 조병득, 오재석같은 동기가 있었고 이영무,조영증, 박성화, 김강남, 김성남, 조광래 같은 쟁쟁한 2~3년 차이의 선배들이 즐비했다. 아마도 내가 축구선수 인생에서 최고로 성장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졸업후 박항서는 제일은행에 입단한다. 그후 1981년 10월 육군사관학교 소속 웅비팀에서 현재 상무의 모태인 육군체육부대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슈퍼리그 출범과 함께 1984년 럭키금성의 창단멤버로 프로에 첫 발을 내딛는다. “제가 럭키금성에서 총 5년 동안 선수생활을 했다. 2년 차에는 우승을 경험했고 더불어 베스트 11에도 뽑혔고 주장도 했지만 그 때 만큼 선수들끼리 돈독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 럭키금성 사훈이 ‘인화’였는데 그 말대로 선수들간의 호흡이 좋았고 나도 코치까지 총 13년 간 럭키금성 한 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고 소회를 밝힌 박 감독은 “축구에서는 기술적인면도 중요하지만 인성도 매우 중요하다. 내가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경남FC 안종복 사장이 젊은 시절 불렀던 별명 ‘뿔소’ 답게 저돌적인 선수였던 그는 성숙한 지도자로 점차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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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딩크와 함께하다
럭키금성에서 코치를 하던 그에게 갑작스런 기회가 찾아왔다. 94년 미국월드컵 코치로 발탁된 것이다.

“저는 김호 감독님과 특별한 인연이 없었는데 막내 코치로 합류하게 됐다. 그 때는 저도 어렸고 홍명보, 황선홍 감독이 20대 초반이었다. 그래서 형같은 모습으로 선수들과 함께 월드컵 치르면서 지도자로서 발전한 시기로 생각한다”는 그는 그후 수원삼성에서 김호감독의 보좌해 지도자수업을 착실히 쌓아갔고 2000년 11월 국가대표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긴다. 명장 거스 히딩크와의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참 철처히 계획적인 분이다. 또 조직을 관리할 때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운용하는 용병술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커로 쓸 선수, 선발용 선수를 구분하고 선수들에게 정확한 역할을 인지하게 한다. 선수들의 심리를 읽는 부분과 위기관리 능력은 타고 나셨다. 나도 히딩크감독과 함께하면서 많이 배우려고 했지만 마지막 부분은 잘 안되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세계적 명장을 만난 박항서는 자신의 지도자 인생을 재정립하는 동시에 2002년의 영광을 안은채 최고의 시절을 보냈다.

◇ 축구는 “팀플레이”
“동료가 잘 할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도 팀플레이고 동료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 것도 팀플레이다”고 그는 강조한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 감독과 포항 수석코치를 거친 박 감독은 2005년 경남FC 초대감독으로 고향에 돌아온다. “당시에는 지역에 축구노하우를 가진 분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 선수 수급도 어려워 첫해 하위권으로 밀렸다”며 “이듬해부터 발품을 팔아 선수들을 구했고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 덕분에 정규리그 4위까지 오를 수 있었고, 처음부터 내 손으로 만든 팀이어서 지금 생각하면 참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며 박 감독의 경남FC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2007년 경남의 지휘봉을 놓은 박 감독은 1년 후 전남을 거쳐 지난해부터 상주 상무사령탑으로 선수들을 이끌고 있다.

“상무에 처음 오니까 나부터 적응하기 힘들었다. 성적도 좋지 않았고 승부조작사건으로 강제강등도 당했다. 선수들이 2년이 지나면 원 소속구단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소속감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는 박 감독은 직접 선수 선발을 진행하며 이근호, 이호, 이재성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설득해 함께했고 시즌 초 부진을 극복하고 리그 최초로 11연승을 기록했다. 박 감독은 “항상 팀플레이를 강조한다. 축구는 혼자할 수 없는 운동이다. 선수들끼리 마음의 문을 열고 손발이 맞는 모습이 11연승의 경기력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며 팀플레이를 강조했다. 1차 목표인 챌린지리그 우승을 이룬 박 감독은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담금질을 하고 있다. “현재 코치진들이 플레이오프 예상팀을 상대로 전력분석에 한창이다. 남은경기 그동안 기회를 얻지 못한 선수들에게 출장기회를 주고 플레이오프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며 향후 계획도 밝힌다. 박 감독은 끝으로 “항상 경남출신으로 초대 경남FC 감독을 경험했던 것이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경남FC 비록 지금 상황이 좋지 않지만 내년에는 훨씬 나아질 것으로 본다”며 경남FC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제발 플레이오프에서 경남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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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59년 1월 4일 경남 산청 생초면
학교= 생초초교- 생초중학교- 경신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선수경력= U-20 청소년 대표(1977~1978), 제일은행 (1981), 육군 웅비·충의팀(1981~1983), 럭키금성(1984~1988)
지도자경력= 월드컵 코치(1994),수원삼성 2군코치(1997~1999), 월드컵대표팀 수석코치(2000.11~2002.06), 아시안게임대표팀 감독(2002.08~2002.10), 경남FC 초대감독(2005.08~2007.11), 전남 드래곤즈 감독(2008.01~2010.11), 상주상무피닉스 프로축구단 감독(2012.01~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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