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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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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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김상훈 시비와 거창 문인들(5)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4)
<35>김상훈 시비와 거창 문인들(5) 
 
신중신 시인은 개천예술제 일반부에 장원하기 전 거창고등학교 재학중에 백일장에 참가해 차상을 차지했다. 제목이‘淡碧:연파랑’이었는데 심사위원들의 고급 취향으로 느껴진다. 신중신의 기억에는 그때 장원은 부산의 여학생이었는데 나중에 신상우 국회부의장 부인이 되었더라는 풍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59년도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중신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가지 못하고 두문불출하고 있는데 친구이자 고등학교 한 해 후배인 고3짜리 이무웅이 개천예술제 백일장에 도전하고 싶으니 길 안내를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마음도 안정이 되지 못하던 차에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그 길로 진주행 버스를 탔다. 신중신은 백일장 현장에 와서 보니 ‘대학 일반부’가 있음을 알고 그 제목‘人生讚歌’에 응모한 것이었다. 자기는 장원을 하고 친구 이무웅은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신중신이 백일장 일반부에 참가하기로 정하고 촉석루 위에 도열해 있을 때 팔을 뒤로 하여 뒷짐지고 있는데 개회식에서 축가 ‘축제의 노래’를 불렀던 숙명여대 음악과 김천애 선생이 풀려 있는 그의 소매 단추를 채워 주었다. 그것을 당선시에 끼워 넣었는데 “어쩌다 나란히 걷고 있는 이가 있어 그의 옷깃이라도 여며 주고 싶은 때가 있고.....”가 그 구절이었다.

김천애 선생은 매년 개천예술제에 숙명여대 음악과 학생들을 데리고 참여하면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고 음악무대나 종합무대에 서서 ‘봉선화’, ‘축배의 노래’ 등을 불러 예술제 관객들에게 음악예술의 혼을 일깨워 주었다. 제11회 대회에 와서 진주극장 무대에 섰는데 대회장 등 일체의 자리에서 밀려난 설창수 시인을 생각하면서 “주인은 어디로 가고 없고 객만 남아 외로운 예술제를 보낸다.”며 “이 자리 없는 성주 설시인을 위해 축배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여 관객들의 마음을 숙연케 했다. 그 소프라노는 신중신의 풀려진 옷소매 단추를 채워 주는 섬세한 분이었다.

신중신에게 백일장 장원은 다음해 서라벌예술대학 진학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주었다. 서라벌예대 신입생 원서에 상장 필사를 하여 첨부했는데 1학년 장학금을 받아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한 다음에 학교에 나갔을 때 백일장에 참가하여 여관에서 알았던 김원일을 만났다. 김원일은 대구농림학교 3학년때 예술제에 참가했는데 그때부터 산문을 썼기 때문에 백일장에는 운문밖에 없어서 그냥 참가의 목적으로 참가한 것이었다. 그 김원일은 후에 거창사건을 다룬 ‘겨울 골짜기’ 등으로 문명을 드러낸 소설가다.

서라벌예대의 1학년때 리더는 양문길(소설가), 김원두(영화감독, 요절), 김원일 3인이었는데 양문길은 교통고등학교를 국비로 졸업하고 고3때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서 가작을 받고 입학했고, 김원두는 중앙대 문예콩쿨, 경희대 등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이미 이름이 나 있었고, 김원일은 학생잡지 ‘학원’ 등에 산문을 발표하여 학원문단에 두각을 드러낸 바 있어 김동리 교수의 총애를 받고 2년 장학생이 된 인물이었다.

신중신은 미당 서정주의 눈에 들어 시 실기 시간에 독무대가 되었지만 집에 돈이 없는 관계로 1년을 마치고 휴학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때 문교부 대여장학금이 두 개가 나와 문창과 하나, 연극영화과 하나를 분배하는데 서정주가 추천하여 쉽게 2학년 장학금을 수령할 수 있었다. 시를 열중하면서 신중신은 성적 관리에 최선을 다했다. 장학금을 타내지 못하면 학업을 중도하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럴수록 소설 파트 김원일, 김원두, 양문길 등에 대한 부러움이 커져 갔다. 그 세 사람은 김동리의 총애를 워낙 많이 받고 있어서 강의를 예사로 듣지 않아도 출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당시 서라벌예술대학은 80명이 입학했지만 실제로 등교하는 학생은 40명 정도였다. 1960년! 4·19혁명의 어수선한 사회적 상황으로 어물쩍 지나갔던 것일까? 신중신은 처음으로 ‘문학의 밤’ 행사에서 읽을 시를 썼다. 그 시는 명동 돌체 음악실에서 읽어야 할 시였다. ‘내 이렇게 살다가’라는 제목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그로 하여금 문단이라는 데로 올라가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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