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동묘
만동묘
  • 경남일보
  • 승인 2013.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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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 (객원논설위원)
속리산 동쪽 끝자락 선유동에서 화양천을 따라 내려가면 화양구곡이 나타난다. 경천벽(擎天壁), 양천(陽川), 읍궁암(泣弓巖), 금사담(金沙潭), 첨성대(瞻星臺), 능운대(凌雲臺), 와룡담(臥龍潭), 학소대(鶴巢臺), 파관(巴串)등 9개소의 아름다운 경치가 차례차례 펼쳐진다. 우암 송시열이 효종 때 이곳에 내려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구곡이라 하였다.

▶숙종 21년(1695) 우암의 문인 권상하가 이곳에 화양동서원을 세웠다. 제향 대상은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구곡을 경영하면서도 구곡가는 짓지 않았다. 현재 남아 전하는 ‘화양구곡가’는 옥소 권섭의 작품이다. 이 서원은 조선후기 양반붙이들의 부패의 온상이었다. 서원의 위세는 국가로부터 물적 지원을 이끌어냈고, 유생들은 땅을 기증하였으며, 백성 수탈의 본거지였다. 제수전 징수를 빙자하여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해 팔아도 관에서 어쩌지 못했다.

▶화양동서원 안에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낸 당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송시열의 제자들이 세운 사당이었다. ‘만동묘’라는 묘호는 조선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에서 따왔다. 재조번방이란 ‘다시 태어나도 중국의 제후국이 되겠다’는 말이다. 만동묘에는 1년 내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전국의 유생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1865년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공자의 어느 구절에 백성을 수탈해도 좋다는 말이 있느냐”면서 선비들의 훼철반대를 물리친 바로 그 만동묘다. 지금 만동묘비는 모든 비문글자가 쪼아진 상태로 세워져 있다. 안내문에 ‘1983년 괴산군에서 묘정비를 찾아 다시 세우고 주변을 정리하였다’고 적어 놓았다.

박동선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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