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5)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5)
  • 경남일보
  • 승인 2013.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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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김상훈 시비와 거창 문인들(6)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5)
<36>김상훈 시비와 거창 문인들(6) 
 
신중신이 최근 ‘서라벌예대 시절 추억’이라는 부제가 붙은 ‘거기 어딘가엔 문학이’라는 글을 썼다.

“고교 졸업후 운명적으로 나를 얽매는 가난과 문학에 내 캄캄한 장래를 구겨박지른 탓에 저조한 학업 성적으로 인해 대학 진학은 꿈도 못꾸고 한 해를 허송한 끝이었다. 집에 죽치고 있는 걸 딱하게 여긴 친척 어른으로부터 한 학기 등록금을 보조해 주겠다는 귀띔을 들은 참에, 서라벌예술대학을 홍보하는 카탈로그를 접하기에 이르렀다. 아이구! 거기엔 김동리, 서정주라는 저 고명한 이름이 금박마냥 박혀 빛을 번쩍이지 않는가. 그 그늘에 들어갈 수가 있다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따로 없고 ‘노래의 날개 위에’가 어디 달리 있단 말인가. 게다가 뭐 ‘문학의 밤’ 행사 스냅으로 동문 여류시인의 낭송사진이 있어 예쁜 다리가 눈을 사로잡기도 했다.”

입학 원서 쓰기의 과정을 그린 대목인데 신중신은 지난 회에서 말한 대로 ‘개천예술제‘에 장원을 하여 그것으로 다음해 서라벌예대 문창과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난망하기만 한 희망 하나 품는’ 것이라 표현했다. 1960년 가을 명동 돌체음악실에서 열리는 문학의 밤에 발표할 시를 쓰게 되었는데 이 작품이 사상계 신인상에 당선될 줄을 아무도 몰랐다. ‘내 이렇게 살다가’라는 제목이었는데 투고하고 나서 발표예정일을 기다리는데 6개월 응모기간을 1년으로 연장한다는 소식에 접하여서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62년 11월 아주 그 작품을 잊어버리고 난 뒤에야 발표를 했는데 뜬금없이 당선에 ‘신중신’이었다. 이때 신중신은 고향의 거창중학교 교사로 발령받은지 일주일이 경과했을 때였다. 당선작 ‘내 이렇게 살다가’는 다음과 같다.

“내 이렇게 살다가/ 한여름밤을 뜨겁게 사랑으로 가득 채우다/ 모두들 돌아간 그 길목으로 돌아설 땐/ 그냥 무심코 피어날까,/저 노을은 그래도 무심코 피어날까.// 그러면 내 사랑은 / 무게도 형체도 없는 한 점 빛깔로나 남아서/ 어느 언덕바지에/ 풀잎을 살리는 연초록이라도 되는가.// 밤새워/ 바늘구멍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던/ 우리 엄마는/ 죽어서 바늘구멍만한 자리라도 차지할까.”(전반부) 이 시를 읽으면 필자는 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개천예술제 장원작 ‘인생찬가’와의 유사성이 보여서 그렇고 ‘모두들 돌아간 길목’이나 ‘노을은 그래도 무심코 피어날까’라는 구절이 서라벌 출신들의 당시의 관행적 표현들이라는 인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구절들은 신중신의 독창적 표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후에 나오는 곳곳의 당선작들이 이 비슷한 취향을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빙그레 웃으며 지나간 60년대를 회상하게 된다.

신중신은 재학중에 있었던 일화를 잊지 않고 꺼낸다. “그 무렵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객기와 허세에 불과한 자긍심뿐이었다. 이런 게 그 예증이다. 우리 친구 중 누구라도 스승 동리, 미당, 목월이 추천권을 행사하던 대표적 문예지 ‘현대문학’을 통해서는 등단하지 말자는 묵시적 약속 같은 게 그것이다. 당시의 문단이 ‘현대문학’과 ‘자유문학’진영으로 양분되어 있었던 바 전자가 문단의 주류를 형성하였던 시기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오인문은 재학중에 ‘자유문학’으로, 오춘자(필면 오지영)는 동아일보로, 서라벌 한 해 후배인 이세방, 정민호는 각각 한 해씩 간격을 두고 ‘사상계’로, 송수권은 좀 뒤에 ‘문학사상’으로 등장했다.

신중신은 1963년 1964년 이태를 거창증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생활과 시를 합일시키지 못하는 공백기를 거치게 되었다. 교사로 적응하고 있는 사이 그에게 군대영장이 송달되었다. 군대는 모든 젊은이에게 유보와 변화와 단금질이라는 용광로인 것일까? 그에게 시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므로 거기에 맞는 ‘아무것’이 시인 것이었다. 구보와 조국과 산야와 군장에 졸병 계급장은 그로 하여금 그 위에 세우는 깃발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탈쟈의 손수건 ”이라는 청마의 ‘깃발’과 같은 그런 시, 그런 시정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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