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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6)<37>김상훈 시비와 거창 문인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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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6:3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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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6)
<37>김상훈 시비와 거창 문인들(7) 
 
신중신 시인은 1965년 거창중학교 재임 중에 군대에 가게 되었다. 중학교 교사 시절 시가 어디 캄캄한 굴속으로 들어가버렸는지 도무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던 것이 입대를 하자 그냥 술술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씌어진 시가 ‘고전과 생모래가 뒤섞임의 고뇌’였는데 연작으로 한꺼번에 5편이 나와 바야흐로 시인 신중신의 문단 신고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출신지 ‘사상계’, ‘현대문학’, ‘문학’ 등에 발표함으로써 신중신이라는 시인이 우리나라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제대후 신중신은 당시 취직난을 뚫고 고향의 대성중학교 교사로 재취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대 있을 때 시심의 갈증이 극대화되던 것이 또 교직생활이라는 빈칸의 세월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한 3년 썩고 난 뒤 1971년 신학기에 보따리를 싸 들고 무작정 상경의 열차를 탔다. 기차라야 진주로 나와 탔을 것이다. 경상도 출신 학생들이 기차를 타면 어김없이 삼랑진 역에서 내려 두세 시간 기다렸다가 부산서 올라오는 서울행 기차를 타야 했다. 이 시간대 학생들은 식당을 선택해 들어가서 밥을 사먹고 거기서 늘어지게 한 시간쯤 눈을 붙였다. 그럴 때 들려오던 기적소리는 ‘내가 어디로 가는가?’라거나 “나의 미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길게 끌고 오는 것이었다.

아마도 신중신은 이 열차에서 어디로 가는가와 무엇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 답의 범위가 지극히 좁혀져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대한민국 시인으로 우뚝 서야겠다는 지향이 있었고 앞으로 결혼을 하면 처자식을 굶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차 있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어딘가로 가고 있었는데 길에서 박재삼 시인과 홍기삼 평론가를 만나게 되었다. 박재삼 시인은 삼천포 출신으로 진주 개천예술제 1회 차상을 받은 사람이니 신중신으로는 족보가 같은 시인을 만난 셈이었다. 두 사람 다 개천예술제 백일장 출신이었던 것이다. 홍기삼은 서라벌 동문인데, 나중에 다시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편입하여 석박사 과정을 거쳐 동국대학교 총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필자는 편입해온 홍기삼과 대학 3학년때 합류하여 2년간 동문 수학했다.)

그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울에서 직장은 구했느냐?”라는 물음을 던졌다. 신중신은 머리를 긁으며 매우 난처하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라 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더니 거의 동시에 ‘삼중당 출판사’가 어떻겠느냐고 동의를 구해왔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삼중당에 들어가 제법 오래 편집부 일을 했다. 취업이 되자 마자 고향에서는 결혼을 서둘러 상경한지 1개월째 되던 날에 결혼 날짜를 잡았다. 신중신의 장인은 당시 거창중학교 교장 이병문씨였고, 진주시 지수면의 대성받이 재령이씨였다. 지수면 하면 구씨 아니면 허씨지만 이씨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지수면은 지세가 국중 명당터로 알려져 있는 대로 재계 인사들이 대거 태어난 곳이다. 구인회, 구철회, 허정구, 허준구, 구자경, 구평회, 구두회, 허신구, 허완구 등이 다 지수면 출신이다. 그쪽 재벌 지세를 비집고 신중신은 시인 사위로 입성한 것이었다.

1970년대 서울생활에서 자주 만났던 문인들은 동기 김원일, 양문길, 김용성 등과 강우식, 이규호, 이근배, 홍기삼 등이 손꼽힌다. 선배급으로는 박재삼, 이형기, 성찬경 등이 가시권에 들어온다. 신중신은 1972년에 첫시집 ‘고전과 생모래의 고뇌’를 내고 둘째 시집 ‘투창’(1977)을 낸다. 필자는 첫시집의 서평을 월간 ‘시문학’에다 게재했다. 그때 의욕적인 평필을 들겠다는 심정으로 썼는데 물리학에서의 ‘공명’(共鳴)현상을 작품의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라는 차원으로 끌고 와 썼다. 공명이란 사물이 갖는 내재적 진동이 외부적 진동을 만나 크게 울림 현상을 보이는데 내재적 진동을 내용, 체험으로 외부적 진동을 형식으로 보고 어울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의 울림이 좋을 때 독자의 감동이 크게 온다는 이야기다. 필자가 신중신 시인을 만난 것은 사이에 신찬식 시인이 끼여 있다. 신중신이 개천예술제에서 재수생 시절에 일반부 장원을 했다는 말을 했는데 그때 신찬식은 중학교를 마치고 잠시 쉴 때 일반부에 나와서 신중신 밑에 참방인가 뭔가에 뽑혔으니 그 기개가 하늘을 치달았다. 그 신찬식이 내게 신시인을 소개했다. 두 사람의 신씨는 성이 다르다. 신찬식은 ‘申’이고 신중신은 ‘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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