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미의 생일
그미의 생일
  • 경남일보
  • 승인 201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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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 (한국농어촌공사 의령지사 과장)
아침상에 미역국이 올랐다. 특별한 날을 암시할 만한 다른 반찬도 없이 미역국만 평상시처럼 밥 옆에 자리를 잡았기에 ‘오늘은 미역국이구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심지어 애들에게 “너희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하는 아내의 협박성 말에도 그저 지나가는 바람소리인양 귀담아 듣지 않고 식탁을 떠났다.

퇴근시간이 되어 가는데 딸내미한테서 스마트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오늘 저녁 같이 먹을 건가요?’ 저녁? 갑자기 뭔 말이지 하며 뜨악한 표정으로 문자를 날렸다. ‘아니, 약속 있음, 저번 주에 잡아 논. 그런데 왜?’ 다시 문자가 왔다. ‘엄마 생일이니 빨리 오세요. 혹시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헉, 재빨리 벽에 걸린 달력에 작게 인쇄된 음력 날짜를 봤다. 아뿔싸~ 이십년 넘게 살아오면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인가? 등줄기로 얼음 조각 하나가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 같은 찌릿한 전율을 느꼈다. ‘이런 낭패가 있나,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곰 다리가 여덟 개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위기에서는 더 빨리 회전하는 잔머리 시스템에서 명령이 하달되었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가 빠른 돈으로 해결하라.

그런데 그냥 돈만 건네면 밋밋하니까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 재빨리 컴퓨터를 두들겨 아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오늘까지 살아온 날을 계산했다. 정확히 1만8279일이다. 하루에 100원씩 계산하니 182만7900원이다. 내 지갑사정으로는 지출하기에 너무 많은 금액이다. 그렇다고 1만8279원을 줄려니 너무 적어 낮 간지럽고 속보인다. 그녀의 통장으로 18만2790원을 입금했다. 물론 잊지 않고 SMS로 입금 확인 문자가 그녀의 폰으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잠시 후 내 예측대로 응답이 왔다. ‘????’ 이게 뭐하는 시추에이션이냐는 약어로 물음표 네개가 왔다. ‘그래, 걸렸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기다렸다는 듯이 만들어 둔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

‘태어나심을 축하합니다. 당신이 태어나신 날부터 오늘까지 1만8279일째입니다. 하루에 10원씩 계산해서 생일 축하금을 드립니다. 하루에 100만 원, 1000만 원의 축하금을 드려도 그 가치를 보상하지는 못하지만 모자란 부분은 내 맘으로 채웠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멘트를 꼬리에 달았다. ‘그런데 나는 저녁 약속 있음. 저번 주 예약됨.’ 그녀에게서 웃음 가득한 문자가 카톡으로 날아들었다. ‘딸내미하고 같이 먹지 뭐~~~ㅎ’ 앗싸! 작전 성공이다. 미리 알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간단하게 맥주 한 잔 했으면 비용이 훨씬 적게 나갔을 텐데 기억시스템의 에러로 출혈이 심하다. 내년에는 아내의 생일을 절대 잊지 않게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네댓 개 큼직하게 덧칠해 놓아야겠다.

/한국농어촌공사 의령지사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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