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왕묘와 진령군
관왕묘와 진령군
  • 경남일보
  • 승인 2013.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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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 (객원논설위원)
서울에서 동대문을 지나 신설동 쪽으로 가다보면 길 오른편으로 ‘동묘(東廟)’라는 현판과 함께 낡은 기와집이 나타난다. 보물 제142호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진인(陳寅)은 남대문 밖에 처음으로 사당을 설치해 남묘(南廟)라 했다.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가 윤성녀라는 무당의 주청으로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묘(西廟)를 세웠다. 명윤동에는 진령군이 세운 북묘(北廟)가 있었다. 이는 모두 중국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 신을 모신 사당들이었다.

▶고종 19년(1882)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날 민비는 창덕궁에 난입한 군인들을 피해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여기서 만난 여인이 이성녀라는 무당이었다. 이 무당은 민비를 보자 일언지하에 8월 아무 날 환궁하게 된다고 단언했다. 이성녀는 장호원에 있는 외가의 소개로 충주로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일찍 죽어 홀몸이 되자 관우 신을 섬겨 무당노릇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충주목사의 신임을 얻었던 것이다.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다시 민씨 일가의 천하가 되자 민비는 이성녀의 예언대로 날짜도 어기지 않고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민비는 이성녀를 극진히 대접했고 진령군(眞靈君)이란 작호도 내렸다. 궁중을 무상출입하게 되면서 진령군이 말해서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지방관리는 이 무당의 입에서 줄줄이 태어났다. 진령군이 시키는 대로 전국 유명사찰과 사당, 명산대천에 제물을 바쳐 왕실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 그대로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으로 진령군과 그 추종세력들은 모조리 구속되고 모든 재산은 몰수당했다. 진령군도 1896년 8월 죽고 말았다. 무당의 넋에 홀린 중전의 혹세무민이 나라를 거들낸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박동선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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