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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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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6:3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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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8)
<39>경남문단의 세 분 중진 지다(1) 
 
2013년 연말 경님문단은 세 분 중진을 보내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김열규 교수, 김춘랑 시조시인, 조종만 시조시인이 그들이다. 김열규 교수는 한국학의 거장으로 1991년에 고성으로 귀향하여 22년 지내고 10월 22일 향년 81세로 별세했고, 전 경남문인협회 부회장 김춘랑 시조시인은 12월 16일 오전 향년 80세로 별세했고, 전 진주남중학교장이던 조종만 시조시인은 12월 24일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한 작가 시인이 일생을 살다간 자리에는 문학적 향기가 서려 있기 마련이다. 그 향기는 경우에 따라 이름할 수 없는 암향으로 산야에 묻혀 있기도 할 것이고 때에 따라 찬란한 작품 속에서 생의 여운으로 살아 숨쉬고 있기도 할 것이다. 그 어떤 경우든 후인들은 그분들이 남긴 업적을 여미고 정리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김열규 교수가 별세한 그 다음날 J일보는 다음과 같이 기사를 썼다.

‘한국학 거장 김열규 교수 별세’ 올해 초까지 매년 한 권 이상의 책을 낸 김열규 교수. 그는 “요즘 사람들이 공부를 통해 자신의 영혼이 자라고 우거지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한국학 분야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가 혈액암으로 투병하다 22일 오전 10시 별세했다. 81세. 고인은 1932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는 병약했다.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었다.”고 할 정도였다.친구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 때도 그의 자리는 책상이었다. 당번과 함께 그는 늘 열외였다. 조회 시간도 체육시간도 그랬다. 그만큼 약했다. 대신 고인은 그 시간에 책을 읽었다. 몸은 약했지만 생각의 근육을 키웠다.“ 그 시절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김열규 교수는 서을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그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했다. 29세에 교수가 되었고 충남대 교수, 서강대 국문과 교수,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객원교수를 지냈다. 그는 정년을 6년 남겨둔 1991년 고향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 829-4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자연과 함께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의 삶을 동경하였다. 소로는 미국의 매사추세스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콩코드에서 죽은 철학자요 시인이요 수필가였다. 소로는 물욕과 인습의 사회 및 국가에 항거해서 자연과 인생의 진실에 관한 파악에 바쳐진 삶을 살았다.

김열규교수는 귀향해서는 이름다운 자란만 바다를 바라보며 산책하고 사색하고 집필했다. 인제대 교수로 70세까지 출근하고 계명대 석좌교수 경상대 민속무용과 등에 출강했다. 지은 책으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한국인의 자서전’,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한국의 문화 코드 열 다섯가지’, ‘고독한 호모디지털’ ‘한국문학 형태론’ 등 70여권이 있다. 김교수가 고성 자란만에 짐을 푼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필자에게 자란만을 설명하기를 “천하 제일 경승은 하일면이요, 천하 제2경승은 하이면이요, 천하 제3경승은 삼천포라”하였다. 그때 나는 그 말을 받아 “천하 제4경승은 사천이라.”고 추임새 넣듯이 말을 이었다. 이때 김교수는 필자가 자기와 ‘죽이 맞는 사람이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무렵 서울에서 김지하 시인이 내려와 김열규 교수댁을 찾았는데, “선생님, 선생님은 성공했습니다.” 불문곡직 그렇게 귀향을 찬양해 마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타관에 나가 일생의 보람 있는 일을 하다가 만년에 고향에 돌아와 부조들의 숨소리와 고향 사람들의 인정을 마음에 붙여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룸을 뜻한다는 것일 터이다.

김교수는 돌아가기 5년전쯤일까? 가톨릭에 귀의했다. 서강대학 교수로 살았으므로 친구 사제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가 세례를 받도록 뒤에서 밀었던 분들은 국내 가톨릭계에 이름이 난 분들이 많았다. 필자는 달력을 수년간 우리나라에서 나온 달력 중에 최고급의 그림 달력을 상당기간 연구실에 걸어놓을 수 있었다. 관련 사제에게서 받은 선물을 김교수는 다시 필자에게 달력 선물을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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