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에서 길을 잃고, 옛 사연을 찾았네
설산에서 길을 잃고, 옛 사연을 찾았네
  • 최창민
  • 승인 2014.01.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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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선정 100대명산 <84>함양 와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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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까지 빠지는 와불산 독바위 인근의 심설산행
 
 
 
 
눈밭에서 길을 잃었다. 많은 눈에 등산로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안내리본도 드문드문하다. 그대로 눈 위에 드러누워 본다. 뭐 그리 바쁜 일이 있겠는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만 내려가면 될 일이다. 하늘을 본다. 지리산에서 날려 온 눈발이 이곳까지 내린다. 눈이 눈에 들어온다. 박하사탕처럼 달콤함과 짜릿함이다.

50년 전 여기 선녀굴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있다.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작고). 그녀는 산청 삼장 내원리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16세에 성석조와 결혼했다. 7개월만에 남편이 빨치산에게 포섭돼 지리산으로 들어가버리자 헤어지게 된다. 그해 겨울 그녀는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간다. 1952년 대성골에서 남편의 사망사실을 알았고 그길로 유격대에 합류해 빨치산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듬해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지리산 하동 빗점골에서 사살되고 빨치산은 와해되는 듯했다. 당국은 1955년 5월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완전히 소탕됐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정순덕은 살아 있었다. 그녀는 천혜의 요새, 지리산 함양 독바위 선녀굴에 은거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1963년 겨울 정순덕 이홍이 등 3명은 산청군 삼장면 상내원리에 내려왔다가 총격전 끝에 경찰에 잡히게된다. 당시 경남일보는 이 소식을 산청 현장 발로 전하고 있다.

보도를 보면 ‘또 망실공비 둘 소탕, 남자 사살, 여비는 생포’ 라는 제목 아래 ‘12일 새벽 동 뒷산에서 망실공비 잔당을 교전 끝에 소탕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이홍이(30)는 사살됐으며 정순덕(29)은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13년의 빨치산 생활을 마감한다.

이후 정순덕씨는 전향했으나 “강요였다”며 번복하고 북송을 요구했지만 당국은 허락하지 않는다. 2004년, 71세에 인천의 한 병원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왜 정순덕일까. 단순하다.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심심산골 삼장 골짜기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남편을 찾아 산으로 떠났으며 죽은 남편 앞에서 살기위해 빨치산 활동을 했다. 여기에 이념이 파고들 틈은 별로 없어보인다. 적어도 여기까지 그녀에게 덧씌워진 이데올로기의 굴레는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엔 잔인하다는 것이다. 선녀굴은 그녀가 청춘을 삭이며 끝까지 생존의 끈을 놓지 않았던 곳이다.

▲와불산은 함양군 송전리 지리산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특별히 이름이 없었으나 등산인들 사이에서 산세가 누워 있는 부처를 닮은 모습이 차츰 알려지면서 비공식적으로 와불산이라고 부른다. 오히려 여기에는 선녀굴, 독바위가 더 유명하다.

▲산행코스 견불사→송대마을→능선→와불산→독바위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능선→송대 삼거리→견불사원점회귀 8.5km 구간에 6시간 소요. 러셀산행으로 시간이 다소 많이 걸림.

▲와불산 산행을 위해서는 함양 용유담을 가로지르는 용유교를 건너고 임도를 따라 올라 견불사까지 간다.

오전 9시 50분 조용한 사찰, 견불사는 연못 속에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의 길지로 알려져 있다. 견불사에서는 뒷편 동쪽으로 천연와불을 볼 수 있다. 거창 미녀봉이 임신한 여인의 형세라면 와불산의 산세는 누워 있는 불상처럼 보인다. 반대편 서쪽에는 신기하게도 보살상이 있다.

견불사 옆 시멘트 도로를 따라 송대마을까지 간다. 참 편안한 마을이다. 산수유와 고염, 감이 나무에 그대로 달려 있다. 산악인 성백균(56세)씨가 살고 있다. 성씨는 한때 이산 독바위 아래 선녀굴 주변에서 텐트를 치고 공부 했다. 송대마을에서 선녀굴 독바위 등 지리산 천왕봉까지 등산로를 개척한 뒤 바위마다 이정표를 기록하기도 했다. 지금은 하산해 송대에 살고 있다.

오전 10시 11분, 산에 붙으면 능선 상에 있는 무덤하나. 명당으로 생각하고 후손들이 묘를 썼었던 모양인데 봉분주변에 철조망을 쳐 놓았다. 무덤이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기 때문인지, 산짐승의 접근을 막기 위함인지 모르겠으나 벌초를 할때는 불편하겠고 절을 할때는 철조망 밖에서 해야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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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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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지 끝에 붙어사는 겨우살이 노란열매를 맺었다.


오전 10시 40분,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없어서인지 오래된 참나무 군락이 잘 보존돼 있다. 높은 나무가지에 곰이 상사리를 친 것처럼 초록의 겨우살이가 자라고 있다. 먹이가 별로 없는 겨울철 곰, 산양, 사향노루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노란 꽃이 핀 것 같은데 땅에 떨어진 것을 보면 노란 열매다. 은행처럼 생겼는데 ‘콕’ 깨물었더니 젤리 같은 액체가 입안에 찰싹 달라붙는다. 뱉으려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최근 이것이 몸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남획되고 있는 식물이다. 겨우살이가 많다는 것은 숲이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스패츠가 필요 없을 정도로 눈이 없어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그러나 고도를 높일수록 눈이 많이 쌓여 무릎까지 빠지고 길도 희미해진다. 끊어졌던 길이 이어지다가 다시 끊어진다. 결국 안내 리본마저 끊어지고 급기야 길을 잃고 만다.

‘지리산의 눈’, 데자뷰처럼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어느 해 신년을 앞둔 12월 31일쯤으로 기억한다. 눈이 허리춤까지 빠졌다. 단 한명의 사람도 오르지 않았던 새벽시간 지리산 천왕봉을 올랐다. 국립공원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선두에 서서 손으로 눈을 헤치기도 하고 삽으로 눈을 퍼내기도 했다. 취재팀은 그 뒤를 따랐다. 심설 속 야간 러셀산행은 힘이 들었다. 천왕봉 중턱 개선문 부근 어느 지점에서 지치고 말았다. 눈밭에 드러누웠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하늘을 봤다. 별빛도 없는 검은 하늘이었다. 기도를 했었던 것 같다. 무탈하게 ‘100명산’을 마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100명산 첫발을 딛는 날이었다. 시간이 흘러 84회째 함양 와불산에서의 심설 러셀산행을 하고 있다.

숨 가쁨이 가시고 취재팀은 다시 오름짓을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와불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높은 곳만 쳐다보고 치오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길없는 길, 경사까지 심해 그야말로 힘든 산행이다. 일반 산행보다 2배정도 더 지체 된다. 감각만을 이용해 산행을 해야 했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고, 깊은 골짜기에서는 허리춤까지 빠진다. 성근 바위틈에 끼이기도 하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스틱까지 파손됐다. 사람의 길이 아닌 동물의 길을 따라가자니 덤불 속에 갇히기도 한다.

심설 러셀산행은 겨울철 산행의 백미로 꼽힌다. 러셀(russel)은 제설차를 만드는 미국의 제조회사 이름, 등산용어로 바뀌면서 눈을 헤쳐 산행하는 것을 통칭한다. 스패츠나 아이젠이 필요한 산행법이다. 심설을 헤쳐야하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많고 산행시간도 많이 걸린다. 특히 선등자가 체력소모가 많아 차례를 바꿔가면서 산행하는 것이 좋다. 무릎 이상이 빠지면 무릎으로 눈을 다지고 길을 확보하면서 운행한다. 체력 안배를 위해 불필요한 동작을 줄이고, 보폭도 평상시보다 줄여야 한다.

선녀굴은 원래 바위틈에서 선녀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있는 천연동굴이다. 지금은 일부가 무너져 있지만 굴속에 또 다른 굴이 형성 돼 있는 2중구조의 특이한 굴이다. 옆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고, 주변에 5개의 굴이 더 있어 은신처로서는 최상의 조건을 제공한다.

출발 2시간이 넘어서야 능선에 올라선다. 독바위는 몇개의 거대한 바위로 구성돼 있다. 두개의 바위틈에 작은 바위가 끼어 있는 형세이며 일부 구간만 로프를 타고 오를 수 있도록 돼 있다. 이곳에 오르면 사방의 조망이 좋아 등산인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다.

북서쪽에 삼봉산, 남서쪽에 지리산, 동쪽에 웅석봉이 조망된다.

오른쪽으로 돌아 벽송능선을 탄다. 벽송사까지 완만한 내림 길이다. 200∼300년은 됨직한 거대한 나무가 부러져 등산로를 막고 있다. 배낭을 멘 채 나무 밑을 통과해야한다. 능선 상에 눈이 많아 부분적으로 경사진 곳에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견불사로 원점하기위해서는 송대 감림길에서 벽송사 하산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내려서야한다. 멀리 범상치 않은 독바위의 위용을 조망할 수 있는 구간이다.

이 아름다운 능선과 바위들이 피로 물들었던 때가 있었다. 도화지 같은 흰 눈위에 선연한 붉은 피가 날렸다. 이데올로기의 갈등 반목이 점철됐었다. 이들은 남이 아닌 우리 부모 형제 자매들이었다. 그 시절이 불과 50여년이 지났을 뿐이다. 산을 내려서면서, 이 땅에 다시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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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독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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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독바위 등산로

 

 

<1963년 11월13일 경남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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