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9)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9)
  • 경남일보
  • 승인 2014.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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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9)
<40> 경남문단의 세 분 중진 지다(2)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 자란만에 귀향하여 사시던 김열규 교수는 2013년 10월 22일 오전 10시 영면했다. 그 전날 그는 경상대학교 병원에 와서 혈액암 진단으로 두 번째 항암주사를 맞고 무사히 자란만으로 가 오후 내내 집필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 다음날 오전 10시 잠자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저서‘독서’에서 “지금 내게는 ‘또 다른 나’가 되고 더불어서 우리가 될 친구가 없다. 몇몇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귀하게 남은 몇은 모두 멀리, 멀리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또 다른 나’이자 ‘우리’가 자그마치 둘이나 남겨져 있다. 바로 자연과 책이다. 그 둘은 이제 나의 천복이다.”라 한 대로 책을 집필하다가 집필 중에 원고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은 그래서 주제가 있는 삶이자 거룩하다.

필자는 그가 영면한 뒤 한편의 시를 썼다.

“그 사이 선생은 가셨다/ 근자에 나는 달력에 0표 치고/ 가위표 치고 생각하고/ 글 쓰고 지치는 사이/ 선생은 가셨다// 선생은 날마다 미소로 꽉, 꽉 인생의/ 달력 채워 나가고/ 노인이 즐겁고 가르침이 즐겁고// 바다가 즐겁고/ 꽉, 꽉 깨알 같은 문장이 즐거우셨다// 선생은 인생이라 그 속에 물결이/ 있었을까/ 기슭이 있었을까, 무슨 이름의 불면이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선생이 저자라는 것이었다/ 채운 것 넘치면/ 넘치는 것 다시 다른 그릇에 꽉, 꽉 채우는데/ 책 이름 여한없이 떨궈 놓고/ 가신 것이었다// 선생은 저자로서 완결편이다 그 사이/ 가시고 가신 뒤는/ 선생의 몫이 아니다 허무도 추념도 선생의/ 공간이 아니다”

김교수는 책을 집필하는 저자로서 완결편이 된다고 말했다. 그의 천복이 자연과 책이므로 책과 더불어 있는 일과 책을 생산해내는 일이야말로 그가 매진하고 전념하는 생애의 전체 목록인 것이다. 이야기는 조금 앞으로 돌아간다.

김교수가 돌아가신 소식을 창신대 이상옥 교수로부터 들은 뒤 일정을 보니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호상소로 이미 운구가 되고 있었고 그 다음날 서강대학교에서 발인예절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장지가 고성이라면 출상일에 고성으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장지는 서울 벽제 김교수 모친의 묘역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 아닌가. 22일 저녁 김수업 교수(전 대구가톨릭대 총장)에게 전화를 해보니 김교수의 영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래 두 사람이 일치된 것은 본당에서 연미사를 봉헌하여 영결에 대신한다는 의견이었다. 전화를 끊은 뒤 김수업 교수는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김열규 교수의 세례명이 무엇인지 물었다. 필자도 세례명이 가물가물하여 고성본당에 물어 연락 드리겠다 하고 전화를 끊고 알아보니 ‘에라 스무스’였다. 이 세례명은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성인의 이름이다.

그러나 에라 스무스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까지 서구의 스타였다. 츠바이크가 지은 ‘에라 스무스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적혀 있다.“에라 스무스가 영국에 갔다. 어느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그가 느닷없이 조금 떨어진 자리로 성큼 다가갔다. 거기 한 무리의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그중 한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당신 크롬웰이죠?’ 그러자 생전 처음 만난 상대가 소리쳤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당신은 에라 스무스죠?’ 이렇게 영국에 간 에라 스무스는 우연히도 당시의 종교 개혁자였던 크롬웰을 만날 수 있었다. 생면이 없는 사람들끼리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종교개혁의 지향에서 일치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열규 교수와 에라 스무스가 일치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성향상 다음과 같은 대목이 김교수를 붙들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에라 스무스는 조용하고 온건하게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크나큰 품을 변화시키려 애썼다. 결코 품을 떨치고 나가지도 않았고 등을 지고 돌아서지도 않았다. 다른 패거리를 만들지도 않았다.”(김열규의 ‘독서’ p.313) 이런 대목에서 김교수의 지향을 살필 수 있고 또 그가 본을 받으려 한 가톨릭 성인으로서의 ‘에라 스무스’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김교수를 위한 발인미사는 서강대학교 성이냐시오관 성당에서 서강대 이사장 김정택 신부와 예수회 사제단의 공동집전으로 거행되었다. 고인의 친구인 성균관대 강신항 명예교수와 제자대표 김병욱 충남대 명예교수가 조사를 했다. 김병욱 교수는 “항상 변화무쌍한 커리큐럼으로 박진감 넘치는 강의를 해주신 덕분에 고전문학과 한국문화이론에 있어서 서강학파라고 불리는 연구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회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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