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 나쁜 여자
나쁜 남자, 나쁜 여자
  • 경남일보
  • 승인 2014.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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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청 (시인·진주제일여고 교사)
지난 몇 년 사이에 ‘나쁜 남자’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전통적인 의미의 ‘좋은 남자’와는 다른 사고와 행동방식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묘한 매력이 있는 남자를 뜻한다. 이처럼 ‘나쁜 남자’란 말이 유행하고 이러한 인물들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 끊임없이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오늘날 시대변화에 따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바뀌었음을 방증한다. 우리는 그동안 인간적인 매력과 삶의 전체적 맥락을 무시하고 선악이라는 이분법에 젖어 인간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나쁜 남자’와 ‘나쁜 여자’란 말 속에는 일반적인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에만 방점을 찍어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긍정적인 함의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식의 변화가 숨어 있다.

우리들이 주목하는 ‘나쁜 남자’는 막장드라마 속의 ‘나쁜 남자’가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막장드라마에는 상식을 한참 벗어난 ‘나쁜 인물’이 등장하는데, 억압된 자기 욕망을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드러내고 상식과 체면도 무시한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순진하기도 하고 차라리 코믹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통한 어떤 노력이나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진짜 ‘나쁜 남자’나 ‘나쁜 여자’의 캐릭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드라마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이 몰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나쁜 남자’도 아니고 오히려 ‘착한 남자’의 일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남자’와 ‘나쁜 여자’의 캐릭터에는 단순히 ‘나쁘다’는 일반적인 통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행동방식이 얄밉고 나쁜데, 그것 이상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기에 ‘나쁜 것’만을 가지고 일도양단으로 비난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는 인물이다.

매력적인 ‘나쁜 남자’의 전형은 역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태종, 세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데 과연 이들이 진짜 나쁜 남자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좋은 남자’와는 다른 행동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준에 따라 그의 공과를 다르게 평가하면서도 이들의 성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가가 일반화되어 있다면 그들이 현실적으로 실패했다면 아마도 만고의 역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사회적 통념으로 주입된 일반적 기준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들에게 끌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뭔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목표에 대한 집중력이 강하고 남들을 의식하지 않는 담대함과 신속한 실행력을 갖추고 있으며, 조변석개하는 인간과 도덕률만으로 조율할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가장 냉철하게 인식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가 이들을 현실적인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그들을 ‘나쁜 남자’로 각인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것이다.

과거든 현재든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냉정함과 단호함이 필요하며, 이로 인해 많은 적이 생기고 ‘나쁜 남자’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가 어떤 목표를 위해 고군분투했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원칙도 없이 자기 욕심을 위해 무소의 뿔처럼 무식하게 돌진하는 것은 ‘나쁜 남자’의 단호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어떤 심리학자에 의하면 현대사회는 점점 더 사이코패스화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쁜 남자’와 ‘나쁜 여자’를 매력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면에는 경계도 모호한 선악이라는 관념에서 탈피하여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고 모든 것을 다 고려하는 ‘착한 남자’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상황에 맞지 않다. ‘놀부’의 심성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흥부’의 심성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항상 선한 사람은 사실 항상 악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항상 선하다는 것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기 기준과 원칙 및 성취욕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재청 (시인·진주제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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