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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먹을거리 흥겨운 수원 나들이박희운의 맛이 있는 여행 <28>경기도 수원 이야기
경남일보  |  young@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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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1.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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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재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부터라고 추정한다. 사람이 반가운 명품도시 수원의 지동과 이의동에는 구석기시대인 25만 년 전에서 4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긁개와 여러면석기, 몸돌, 격지 등이 채집되었으며, 고색동유적과 파장동유적에서는 여러면석기 및 긁개, 밀개, 홈날, 주먹대패, 찌르개, 몸돌 등이 수습되었다. 또 화서동 꽃뫼유적과 율전동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빗살무늬토기편이 채집된 것으로 보아, 여기 수원에는 수십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 수원을 최초로 차지하였던 국가는 백제였는데, 3세기 중엽 이후인 고이왕과 근초고왕 때에 고대 국가체제를 완성하여 지금의 경기도지역 대부분이 당시 백제의 영토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하여 한강유역과 수원을 포함한 그 주변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이때 수원의 지명은 ‘매홀(買忽)’이었다고 한다. 매홀은 물고을이라는 발음의 표기로 추정되며, 여기에서 한자식 지명인 수원이 유래한다고 할 수 있으며, 고려 태조 때 수주, 원종 13년(1272)에 수원도호부가 되어 ‘水原’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수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수원부, 수원군, 수원부로의 변화를 거듭하여 현재는 경기도의 도청소재지이다.

서울을 출발하여 남쪽 약 40km 쯤 차를 달려 동산과 팔달산에 둘러싸여 있는 수원시에 들어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해우재이다. 해우재는 국회의원과 수원시장을 지낸 분이 세계인에게 화장실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변기모양의 건물을 지어 수원시에 기증한 것으로 ‘근심을 푸는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분뇨를 퇴비로 쓰던 농경문화의 전통 속에서 뒷간 통시 측간이라 불리는 화장실을 이용해왔는데, 근대화의 역사 속에서 변소로 그 이름이 바뀌었고, 빌딩이나 호텔, 도시 상류층은 호화로운 첨단기구로 화장실을 장식하여 차츰 문화 공간으로 그 용도를 넓혀가고 있는 이 시대에 해우재는 그 옛날 배설의 추억을 더듬어 볼 수 있어 재미를 더하는 곳이다.
▲신풍루
 

화성장대


다음 코스는 수원화성이다. 화성은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길이 5.4km의 성곽으로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고 있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평가되는데, 조선 후기 정조 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9월 10일에 준공되었다. 기존의 화강암이 아닌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으며, 정조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갖고 있어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고 있으며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이 있다.

오늘 점심은 서문인 화서문을 둘러보고 장안공원을 따라 걸어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을 살펴본 후 간단하게 복요리를 먹을 생각이다. 화서문은 행궁으로부터 460보 떨어져 있으며, 좌우의 돌계단을 꺾이게 하여 층을 만들었고,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총안 19개의 구멍과 활을 쏠 수 있는 구멍 6개를 뚫어놓은 보물 403호이다. 공원길을 걸으며 볼 수 있는 성곽과 북포루는 아름답기 한량없고, 화서문에서 700m 쯤 걸으니 장안문이다. 보통은 성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인데,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들의 수도였던 장안(시안)에서 따온 것으로 당대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이기를 바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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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맑은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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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전
 

고도이지만 잘 정리되어 이방인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하는 시가지를 가로질러 수원시청 주변에 위치한 복어요리 전문점인 복남복녀를 찾아간다. 차림표에는 복어에 산삼과 전복, 버섯 및 각종 야채를 넣어 끊인 탕인 봉용패우탕이 있었지만 점심식사라 그냥 간단하게 복전 복튀김 복맑은탕을 조금 시켜서 평소에 잘 접하지 못했던 복요리로 행복해하고 있는데, 인심 좋은 사모님은 복칠리튀김 복떡국 복칼국수의 맛을 보여주며 요리에 대한 설명까지 아끼지 않아 마치 내가 복요리 전문가가 된 기분이었다. 평소에 그냥 복국이나 복매운탕 정도에 만족했던 나는 이렇게 복으로도 다양한 요리해서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우리 음식문화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화학조미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아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음식과 같이 정성이 가득한 자연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저렴한 가격으로 즐긴 복요리로 만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을 지닌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을 지나 화성행궁으로 향한다. 행궁은 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으로 화성행궁터는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고, 한국의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곳이며, 사적 3호인 수원화성의 부속물이다. 정조 20년인 1796년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아버지의 능인 화산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쉬었고, 당시에는 봉수당과 경룡관 복내당 유여택 노래당 신풍루 남북군영 강무당 무고 수성고 집사청 서사청 비장청 우화관 득중정 행각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화성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의 원래 이름은 정남헌이며,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푼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봉수당으로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많이 훼손되고 낙남헌만 남게 되었으며, 낙남헌은 봉수당 북쪽에 있던 ㄱ자 건물인데 노래당과 함께 곱은 ㄱ자형으로 배치된 초익공 양식의 팔작지붕집이었지만, 지금은 꺾인 부분이 잘리어 없어지고 一자형의 건물로 바뀌었다. 1975년 화성 복원 결정과 함께 행궁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 10월 9일 화성행궁 21개 건물 중 18개 건물과 정조의 영전인 화령전 등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개관식을 가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성행궁을 둘러보고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펼쳐지는 공연에 잠시 빠졌다가 화성장대인 서장대로 오르는 길에 화성관광열차를 탑승할 수 있는 정류장도 볼 수 있었다. 동력차와 관광객 탑승차량 3량으로 구성된 화성관광열차는 앞부분은 임금을 상징하고 힘찬 구동력을 상징하기 위해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이 앉는 객차는 임금의 권위를 나타내면서 관람의 편의성을 위해 임금이 타던 가마를 형상화하여, 매일 오전 10시~오후 5시 50분까지 운행구간인 팔달산(성신사)-화서문-장안공원-장안문-화홍문-연무대 3.2km 구간을 운행하니 시티투어의 교통수단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잠시 가파를 산길을 오르면 서장대에 이른다. 서장대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하여 9월 29일에 완공하였고,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수원화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팔달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할 수 있어 그 자리가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좋은 위치라고 생각되며, 과연 수원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장대 바로 뒤의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서 동향하여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여 솟아있다.

잠시 화성 성곽길을 걷다가 하산하여 바로 수원화성박물관으로 향한다. 화성박물관에는 화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화성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문화유적 등이 재미있게 전시되고 있고, 수시로 기획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어 볼거리가 가득한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상설전시, 기획전시, 야외전시 등으로 나누어 전시되고 있는데, 각 전시실을 둘러보면 정조가 화성 건설에 심혈을 기우리며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꿈이 깃든 도시를 만들고자 하였던 마음이 담겨 있으며, 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화성을 건설하는 모습과 자급자족의 계획도시로 발전하는 수원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정조의 충신이자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번암 채제공을 주제로 한 특별기획전도 볼 수 있었다.

동지에 가까운 이 계절은 해가 짧아 벌써 어둠이 밀려온다.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동문인 창룡문을 지나 삼부자갈비로 향하여,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가족들과 함께 하는 만찬이라 소갈비를 주문했다. 소갈비를 소금 설탕 참기름 통깨 후춧가루 파 마늘 생강 물엿 청주 등에 재워 두었다가 잘 손질하여 숯불에 올려 구워주는 갈비를 한 입하니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정조 때 소를 나누어 주어 기르게 하였던 정책과 함께 발전한 축산장려정책으로 인해 수원갈비라는 향토음식이 생겨나게 되었다는데, 그 역사만큼이나 깊은 맛에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즐거워하며 수원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삼천포중앙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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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자 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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