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계란과 죽은 바위 이야기
산 계란과 죽은 바위 이야기
  • 경남일보
  • 승인 2014.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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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 (창원YMCA 명예총장)
영화 ‘변호인’에서 계란과 바위에 관한 이야기가 두 번 등장한다. 부동산 등기업무로 성공한 송우석 변호사가 동창회 회장이 되어 친구들과 뒤풀이를 하기 위해 돼지국밥집으로 왔다. 함께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TV 뉴스를 보던 친구가 언론을 믿을 수 없다고 투덜댄다. 송 변호사는 서울대학교까지 가서 데모를 하는 학생들을 비난한다. 심지어 공부하기 싫어서 지랄하는 것이라고까지 한다. ‘부산신보’에 근무하는 그 친구는 변호사라는 게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른다고 큰소리로 나무란다. 목소리를 높이던 두 사람은 결국 난투극을 벌인다.

싸움이 끝나고 친구들이 돌아간 다음 어질러진 식당 안에는 대학생 박진우와 송 변호사만 있다. 빗자루를 들고 깨진 그릇과 유리를 치우고 있는 진우에게 ‘니는 데모하지 마라. 데모하면 천벌 받는다’고 말한다. 자세를 바로잡고 정색을 한 진우는 데모하는 학생이 천벌을 받으면 데모하게 만드는 사람은 무슨 벌을 받느냐고 물으면서 계란과 바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계란은 살아 있고 바위는 죽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듣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물론 송 변호사는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부동연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초반이다. 단순한 대학생들의 독서모임에 불과한 것을 고문과 조작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추진하는 빨갱이 모임으로 만든 사건이었다. 대학생들이 읽었다는 책이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게 하는 용공서적이라고 주장하는 검사측과 법정공방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난 다음이었다. 구치소 면회실에서 진우와 송 변호사는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순수한 대학생 박진우가 불법 구금된 몇 개월 동안 겪었던 폭력은 그가 갖고 있던 미래를 향한 꿈과 희망을 산산조각 내었다.

첫 번째 재판에서 검사는 자필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하였다. 대학생들이 모여서 월남은 패망한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된 것인데 우리도 그 길로 가야 한다는 모의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권력자들에 의해 면밀히 짜여진 각본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고문에 의해 작성된 것이었다. 판사는 진우에게 직접 본인이 작성한 진술서인지를 물었다. 곧바로 송 변호사는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이의제기했으나 변호사에게 물은 질문이 아니라는 한 마디로 묵살한다.

어쩔 줄 모르는 진우를 향해 ‘예, 아니요’로 답변하라고 윽박지르는 판사에게 어쩔 수 없이 ‘예’라고 답변한다. 예라고 답변할 때의 진우 얼굴에는 진실에 대한 포기가 역력하였다. 이미 경험한 수사과정이 짜여진 각본대로 고문에 의해 진행되었듯이 재판 역시 각본에 의해 꼭두각시들이 밀어붙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쳐 있는 진우에게 송 변호사는 계란과 바위 이야기를 하였다. 살아 있는 계란이 죽은 바위를 넘어선다고 말했던 것을 잊어 버렸냐고 하면서 진실과 양심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돼지국밥집에서 있었던 첫 번째 장면에서는 송 변호사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 어리둥절했는데 두 번째 장면의 구치소 면회실에서는 대학생 진우가 계란이 살아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철옹성 같은 권력에 순응하는 삶이 편하게 사는 길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 무모한 행동은 자신만 손해라는 것이다. 유난히도 험난했던 현대사를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요령이다. 그래서 불의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을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라고 나무란다. 고정관념과 기득권이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쳐 나갈 수 있는 청년들에게 순응과 포기만을 강요해온 어른들이 많다.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해온 송 변호사 역시 대학생이 데모한다고 세상이 달라질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을 했다. 물론 데모가 능사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가만히 살펴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배워서 남 주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해에는 이 시대를 힘겨워하는 많은 청년들에게 진실을 추구하는 용기를 북돋워 주는 어른을 만나고 싶다.

전점석 (창원YMCA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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