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새긴 독립염원 그 자리에 그대로
바위에 새긴 독립염원 그 자리에 그대로
  • 최창민
  • 승인 2014.01.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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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선정 100대명산 <86>곡성 동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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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능선이 동악산 정상. 멀리 뒷편에 보이는 산은 공룡능선과 형제봉
 
 
 
본보 초대 주필 위암 장지연 선생은 1901년 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한 뒤 언론을 통한 계몽활동에 진력했다. 1905년 일제가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국권침탈을 폭로하는 사설을 쓴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됐고 황성신문은 정간 처분됐다. 석방 후 그는 진주로 내려와 1909년 10월 ‘경남일보’ 초대 주필을 맡아 다시 언론을 통한 구국운동에 매진한다. 1910년 8월 일제 강점을 기점으로 매천 황현이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자결하는 일이 발생한다. 위암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10월 11일자 경남일보에 매천의 절명시를 싣고 통분과 비통함을 만천하에 알린다. 이 일로 경남일보도 강제 정간됐고, 위암은 이듬해 마산에서 생을 마감한다.

일제는 위암이 쓴 시일야방성대곡, 매천의 절명시 게재 이유로 황성신문과 경남일보를 각각 강제 정간시킨 것이다. 본보 정간의 이유가 된 매천의 절명시 1편을 여기 다시 소개한다. /새와 짐승도 슬프게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무궁화의 세상이 이제는 스러져 가노라/가을밤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날을 생각하니/인간세상에서 글을 아는 사람의 노릇이 참으로 어렵도다/ 지식인으로서 삶과 고뇌가 느껴지는 명문이다. 그는 결국 지식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간단없는 죽음으로 실천했다.

매천(1855~1910)이 어느 시기엔가 곡성 동악산에 다녀갔다. 도림사 청류계곡 ‘해동무이 8곡’ 암반에 새겨진 글에는 황매천 등 한말 유학자 간재 전우(1841~1922), 연재 송병선(1836~1905)이 다녀 간 것으로 돼 있다. 여기에 ‘중류지주 백세청풍’(砥柱中流 百世淸風)글귀가 새겨져 있다.

▲동악산은 전남 곡성군 월봉리에 있다. 높이 737m. 곡성사람이 과거에 급제하면 산이 흔들리고 아름다운 노래 소리가 들렸다는데서 유래됐다. 청류동계곡 상부 배넘어재를 중심으로 남쪽에 형제봉이, 동쪽에 동악산이 있다. 북쪽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른다. 강가에 ‘살뿌리’라는 원시 고기잡이법 독살이 있다. 산이 품은 도림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한 사찰로 신덕왕후가 왔다가서 신덕사로 부르다가 현재는 도를 찾는 승려들이 많이 모여든다하여 도림사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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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사


▲산행은 도림사→청류동계곡→길상골 첫갈림길→배넘어재 두번째 갈림길→마른계곡→첫능선→신선바위→정상→계단→무인산불시스템→청계동·살뿌리갈림길→배넘어재→왼쪽 하산→공룡능선·형제봉 갈림길→길상골 첫갈림길회귀→도림사. 주행거리 10km에 휴식포함 5시간 소요.

▲오전 8시 30분, 도림사를 지나 전남 기념물 101호인 청류계곡을 따라 오른다. 도림사계곡으로도 불리는 청류계곡은 해발 735m의 동악산 기슭에서 발원해 너럭바위 위를 옥수정처럼 흘러내린다. 유학자 조병순(1876∼1921)이 1곡 쇄연문에서부터 무태동천, 대천벽, 단심대, 요요대, 대은병, 모원대, 해동무이, 9곡 소도원까지 이름을 붙였다. 전국의 9곡들은 대개 선비들의 유유자적 ‘바람과 달의 노래 터’이지만 이곳은 비감한 장소다.

시대상황이 그랬던 만큼 누란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우국지사들의 비장함이 담겨 있다. 그 중 ‘8곡 해동무이’는 조선의 자주독립 염원이 묻어 있다. 너럭바위 위에 ‘중류지주 백세청풍’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글귀 맨 끝줄 첫머리에 ‘황매천이 다녀갔다’는 내용이 있다. 중류지주는 중국 황하 중류의 석산이 마치 돌기둥처럼 서 혼탁한 물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백세청풍 역시 ‘오래토록 부는 맑은 바람’이란 뜻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선비의 절개’를 이르는 말이다. 세류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매천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글이다. 매천이 마지막 자결한 곳이 이곳과 가까운 구례다. /쾌사창애일도천…, 푸른 절벽 사이를 쏟아져 내리는 한줄기…/로 시작하는 ‘주부자의 시’ 옆에 조병순(1876∼1921)이 송각 했다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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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곡 해동무이, 중류지주 백세청풍 아래 매천 황현이 다녀갔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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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악산의 암릉


첫번째 철계단을 건너고 첫 갈림길을 만난다. 오른쪽이 동악산(3.1km), 왼쪽이 길상암 터를 거쳐 형제봉(3km)으로 가는 길이다.

두번째 갈림길을 만난다. 이정표는 왼쪽이 배넘어재, 오른쪽 동악산 2.3km를 가르킨다. 곧장 황토와 마사토가 적당히 섞인 토종소나무 숲길이다. 소나무의 키는 크지 않고 활엽목도 별로 없다. 가풀막 언덕에서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면 공룡능선 형제봉의 웅장함이 보인다.

첫 능선에 올라선다. 갈림길 왼쪽이 동악산 방향, 오른쪽이 월봉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능선에 서면 이때부터는 제대로 된 산길을 즐기면서 갈수 있다. 특이한 바위와 늙은 소나무가 교차하는 매우 아름다운 길이다. 길이 좋아 겨울인데도 살갗에 닿는 바람이 신선하고 햇살도 좋다. 능선 길을 따라 300m정도 더 오르면 안부 갈림길에 닿는다. 오른쪽 200m 지점에 신선바위가 있다. 30평정도 규모의 평평한 바위로 전망이 트여 시원하다.

오전 10시 10분 동악산 정상에 닿는다. 크고 작은 돌과 바위로 탑을 쌓아놓았다. 돌로 만든 인상적인 솟대인데 꼭대기 일부가 무너졌다.

돌탑 뒤에 ‘배넘어재 3.1km 형제봉 5.5km’ 이정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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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곡성을 신선의 땅으로 언급했다. 곡성 중에서도 신선의 땅으로 점지할 만한 곳이 동악산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근세에 와서는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을 달랬던 우리 선비들의 격정과 비장함이 서린 땅이다.

정상을 약간 벗어나면 비로소 동악산의 절경을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이 나온다. 올라왔던 곳과는 달리 정상 반대편은 온통 큰 바위들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사뭇 다른 풍경이다. 기둥처럼 생긴 바위 사이사이를 나무데크로 연결해 편한 산행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하산 길은 경사가 너무 큰데다 겨울철 눈과 얼음까지 계단에 붙어 있어 위험한 구간이다. 인근에 산불 무인감시시스템구조물이 있다. 태양광 센서판, 카메라와 스피커 안테나 등이 있는데 고장 났는지 카메라가 꼬꾸라져 있다.

정상을 떠난 뒤 응달진 구간에는 눈이 두껍게 남아 있어 눈밭에 뒹굴어 보거나 밟으면서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전 11시께 데크로 정비한 등산로가 다시 나타나고 곧이어 앞서 정상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암릉이 나온다. 다가가면 위태롭거나 위험한데 사진을 찍느라 눈을 쉽게 뗄 수가 없다. 눈밭 곳곳에 찍힌 발자국은 겨울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고라니와 삵의 발자국이다.

배넘어재 못 미쳐서 갈림길을 만난다. 오른쪽 섬진강 방향으로 6.2km를 하산하면 살뿌리다. 살뿌리는 원시적인 물고기 잡이를 하던 곳. 강을 비스듬하게 가로질러 돌보를 쌓아 강물을 한쪽 방향으로 모아 유속을 빠르게 한 뒤, 물고기가 빠른 물살에 딸려내려가 자동적으로 대발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방식이다. 이때 대발을 유속이 세고 낙차가 큰 곳에 설치하는 것이 핵심이다. 과거 섬진강에 물고기가 풍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곳에 도깨비살 전설이 있다. 마천목장군이 섬진강물고기를 잡아 부모를 공양했는데 고기잡는 일에 어려움이 닥치자 한밤에 도깨비들이 나타나 돌보를 쌓아줘 효도를 계속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섬진강가에는 도깨비 동상이 서 있다.

50여분의 휴식 후 오후 12시 30분 배넘어재에 닿는다. 정면 1.8km지점에 대장봉. 2.4km지점에 형제봉이다. 취재팀은 왼쪽 도림사 방향으로 하산길을 재촉한다.

오후 12시 40분 철교를 지나고 곧이어 오른쪽 공룡능선을 통해 형제봉으로 직접 오르는 가파른 길을 만난 뒤, 갈라졌던 길상암터 가는 갈림길을 지나 도림사에 회귀한다.

청류동계곡 한가운데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돌확에 눈길이 머문다. 완성된 것이라면 스쳐 지났을 텐데 미완성으로 버려져 있다. 어쩐 일인가. 석공이 무슨 화를 입었을까. 아니면 세상에 어떤 난리가 나 세간살이 다 버리고 쫓기는 신세가 됐을까. 늙은 석공의 행적이 궁금하고, 그런 상상이 허공에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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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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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악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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