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경남문단, 그 뒤안길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1)<42>경남문단의 세 분 중진 지다(4)
경남일보  |  gnnews@gn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7.20  16:33:26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1)
<42>경남문단의 세 분 중진 지다(4) 
 
김열규 교수는 1991년께 고성으로 귀향했을 때 서울 강의와 방송 등으로 인해 자주 서울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때는 주로 사천 비행장을 이용했다. 그때 김교수의 서강대 제자 두 사람이 경상대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국어국문학과에 이재인 교수(국어학)가 있었고 국어교육과에 최시한 교수(소설론)가 있었다. 김교수가 이 두 제자에게 연락하면 사천 비행기표를 사서 쥐고 하일면으로 가서 건네거나 미리 예약할 수 있었을 때는 예약 처리를 제자들이 맡아서 했다. 그 가운데 최시한 교수가 일을 도맡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필자는 이 두 제자의 태도를 보고 김열규 교수의 스승으로서의 무게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제자가 갖는 마음을 보고 그쪽 연구 학자들이 학문 공동체로서의 따뜻한 교감이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최시한은 충남 보령생으로 용산고교와 서강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1982년 ‘우리 세대의 문학’에 ‘낙타의 겨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거쳐간 문인들이 그러하듯이 국어교육론의 흔적이 작품에 반영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고치고 더한 수필로 배우는 글읽기’,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등이 그런 작품에 속한다. 그는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현대소설의 이야기학’ 등의 연구물들을 내놓았다. 김인환 교수(고려대 명예교수)가 경상대학에 있다가 고대로 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문학 교육론’을 펴낸 것도 그런 예일 것이다.경북대학으로 간 이상태교수의 여러 저술들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김열규 교수의 다른 한 제자 이재인 교수는 국어학 분야이므로 여기서는 줄일까 하는데 다만 필자와 같이 한 시대를 살았던 교수였으므로 관련 에피소드를 챙겨볼까 한다. 그는 늘 신중했다. 어눌한 체하면서 어눌하지 않고, 느린 듯하면서 느리지도 않고, 문법의 이랑을 밭 매듯이 매면서도 문법의 소소한 규칙에 매이지도 않았다. 그는 늘 시야를 크게 열어놓고 있었다. 그가 서울을 갔다오면 서울의 복잡한 소식들을 보따리 하나로 싸서 왔다. 그것을 푸는데 푸는 일도 신중했다. 말하자면 그 말의 말끼를 알아듣는 사람에게는 다 풀고, 못 알아 듣는 이에게는 그만큼 비 지나가는 속도로 개괄적인 것에 묻히게 했다. 그래서 필자 등은 시대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이교수가 없었다면 우리는 늘 풍문 수준에서 자전거 바퀴를 굴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어쩌다 보니 박카스 병에다 소주를 채워 갖고 마실 때가 있었다. 애주가이군요, 라 말해 주었지만 그가 서울에 식구들을 두고 홀로 원룸 같은 방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사람으로서는 그만이 만들어낸 고독 해갈의 기법일 것이라는 판단을 하기도 했다.

김열규 교수에게로 돌아오자. 그의 저서 ‘독서’에 의지하여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8·15해방은 김열규에게 별난 선물을 안겨 주었다. 패전국 일본인들은 부산항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간편히 연락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라야 했으므로 오늘의 부평동 국제시장에서 짐짝에 대한 경매 붙이는 일이 빈번해졌다. 적산, 곧 적의 자산을 몰수한 것을 내놓는 것인지, 아니면 일본인들이 자의적으로 내놓는 것인지는 모르나 ‘고리짝’에 담긴 짐들이 수도 없이 경매에 붙여졌다. 낙찰이 되면 경매꾼이 ‘돗따!’라 소리 질렀다. 돗따란 일본말로 뭔가를 땄다거나 손에 넣었다는 뜻이다. 나중에 그 일대가 본격적인 시장거리가 되면서 ‘도떼기 시장’이라는 말이 붙었다.

이 도떼기 시장에서 중학생들은 귀한 책들을 수집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가 되었다. 사람들이 경매로 입수한 고리짝에서 책이 나오면 다들 재수에 옴 붙었다고 말하며 패대기를 쳤다. 김열규 등은 이 기회를 노려 흩어진 책들을 주워 모았다. 난데없이 돈벼락 아닌 책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상술에 재빠른 사람들은 이 책들을 모아 작은 책가게를 내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보수동 골목의 헌책방 단지가 된 것이다. 김열규는 “조국 해방 만세”를 외쳤다. 2차대전 말기 중학 1,2학년들은 교과서 이외의 책들은 구경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열규 교수의 책 만나기의 감격 곁에 나타난 그 보수동 책방 거리를 필자는 그보다 오랜 후 아무런 감격도 없이 거닐었다. 김교수께서 지금 계신다면 웃으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해버릴 것 같다.
경남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