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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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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6: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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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2)
<43>경남문단의 세 분 중진 지다(5) 
 
오늘 아침 TV에서 청국장 선전을 하는 것을 보면서 김열규 교수를 떠올렸다. 김교수가 언젠가 TV 선전을 보고 지리산 밑 차도 잘 못들어가는 마천골 더 깊은 골에 가서 조선 된장을 사 가지고 와 먹는다고 했다. 마침 우리가 하일면 김교수댁을 방문했을 때 늦은 점심을 얻어 먹는데 예의 그 된장을 끓인 것이라 하고 반찬으로 내놓았다. 그러니까 김교수는 평소 먹거리나 생활을 그 특유의 섭생 방법을 실천하면서 사는 편이었다. 일테면 커피도 직접 기계에서 내린 커피를 썼고, 다방커피나 종이 커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날 산골 궁벽진 길을 가는데 간이 휴게소가 있어서 들어가 보니 원두커피가 없자 하는 수 없이 자판 커피를 한 잔 내려 입에 갖다 대었지만 차마 입 안으로 들여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 입술에 조금 대다가 휴지통에 버리면서 “위장아, 그래도 입술을 조금 적셨으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라!”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섭생 관리를 생각하면서 김교수는 백수는 느끈히 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귀향 초기 진주를 방문했을 때 몇몇 사람이 김교수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자리가 있었다. 진주문고 여태훈 사장과 박노정 시인 등이었던 듯하다. 김교수가 대뜸 “진주에 호박죽 잘하는 데나 전을 잘 부치는 집이 없느냐?”하더라는 것 아닌가. 그것은 다 어렸을 적 할머니가 잘해 주시던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잘 살피면 김교수는 학문 연구의 방법은 철저히 서양식이지만 정신은 동양식이고 우리의 전통에 깊이 젖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김교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6년제 중학은 부산공업고등학교에 다녔다. 그가 공고에 들어간 내력을 저서 ‘독서’에서 “일본 식민지시대 부산 시내에는 조선 학생이 들어갈 만한 학교가 공업학교뿐이었다. 인문계 학교는 아예 없었고 상업학교조차 전시체제를 핑계삼아 공업학교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라 밝히고 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그의 학교생활은 꼬이기 시작했다. 몇 과목 빼고는 모든 과목이 싫어진 것이었다. 체질적으로 싫었다는 것이었다. 인문사회계의 교양과목이나 수학 과목 말고는 교실에 앉아 있기도 역겨웠다는 것이다. 4학년때까지는 그래도 기를 쓰고 참았다. 하루는 학교 안에 있던 기계공장의 실습 조교는 김열규를 기계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가 기계를 만지면 예외없이 주저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 선생은 “낙제점은 면하게 해줄 테니 기계에는 손도 대지 마.”하고 출석을 따지지 않았다. 제도권 안에서 치외법권을 누리는 셈이었다.

오후만 되면 온통 기계, 또 기계였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도시락과 책 몇 권을 챙겨 철조망을 빠져나가 학교 뒷산으로 탈출했다. 낮은 언덕 하나만 넘으면 비교적 큰 저수지가 나타났다. 외진 그곳을 사람들은 목골이라고 불렀다. 오후 내내, 그러니까 수업이 끝나고 다들 돌아갈 때까지 그는 그야말로 유유자적이었다. 낮잠을 자도 좋았고 저수지 주위를 산책해도 좋았다. 여름이면 수영을 했다. 산골 속 저수지라서 저절로 물뱀을 벗삼게 되었다.머리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과 나란히 그도 물살을 갈랐다. 그런 뒤에 책을 읽었다.

이 대목을 유의하면 그는 뱀과 친숙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필자가 김교수댁을 방문했을 때 그는 집 뒤에 작은 돌벽을 타고 물이 흘러오는 웅덩이에 예쁜 꽃뱀이 나오곤 하는데 그것이 너무 앙증스럽다고 말한 것이 기억된다. 필자로서는 기절초풍할 이야기다. 그 물뱀을 애완으로 기르듯하는 그가 민속학의 깊이로 가면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인가, 하고 물음표를 던져 놓은 바 있었다. 그런데 그 뱀 사귀기의 역사가 중등학교 시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라 경문왕이 생각난다. 삼국사기 경문왕조일 것이다. 왕궁에는 아침마다 궁녀들이 뱀 퇴치 청소를 했는데 뱀이 왕의 침소에 우글거렸다는 것이다. 그럴 때 경문왕은 궁녀들에게 “내버려 두거라.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잠들 수가 없니라.”고 했다는 것으로 보아 뱀과의 띠가 잘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문왕과 김열규 교수의 공통점은 또 있다. 경문왕이 화랑시절 천하를 주유할 때 미풍양속을 잘 살펴 임금 헌안대왕의 눈에 띄었다. 그 공으로 부마가 되고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지역 곳곳의 풍속과 전통의 의미를 찾아내는 민속학 내지 한국학이라는 점에서의 어떤 끈이 연결된다는 느낌이다.

앞으로 돌아가서 치외법권을 누렸던 김열규는 용케도 학도호국단 ‘문화선전부장’을 맡았다. 이래 저래 그는 그만의 길을 가는 리듬을 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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