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기다리다
매화를 기다리다
  • 경남일보
  • 승인 201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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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숙자 (시인)
순도 높은 완전한 겨울날 소박한 시골밥상 집에 밥을 먹으러 갔다. 현관 입구에 걸려있는 투박한 조각칼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나무액자 하나가 사로잡는다.

“뼈속에 스며드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야 어찌 매화 향기를 얻으리오”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만 고대하던 암중모색의 시기에 그리움이랄지 애잔함이랄지 또 한그루의 매화는 차가운 겨울 식당 벽에서 견디고 있었다.

매화꽃이 바람에 눈처럼 하늘하늘 흩날리는 상상이라도 해야 야멸찬 이 겨울을 날 것만 같다. 아니 머지않아 눈속에 매화가 피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곧 날아 들리라. 세속에 물든 내 눈과 귀를 청정하게 깨워 놓으리라.

엄동설한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서 벼루에 먹을 갈다가 화첩을 넘긴다. 고매의 가지가 죽죽 격조있게 그려진 매화 그림 앞에서 나는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정신의 빈한함이나 구차함을 굳이 고백하지 않아도 매화 앞에서는 저절로 고독하고 저절로 깊어진다.

옛부터 매화는 사군자 중에서도 으뜸으로 쳐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일생동안 비바람 속에서도 참고 견디어 이른 봄이 되면 가장 먼저 꽃과 향기를 피운다는 것이다. 군자의 절개와 여성의 지조를 상징하는데 내가 그린 매화 그림에도 있는 화제 글이다.

지난 봄 문학기행 때 가 보았던 도산서원 앞 마당가에 서있던 고매 한그루. 기생 두향이 퇴계에게 주었던 정표였다 한다. 내색할 수 없었던 퇴계는 마지막 가는 길에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하여 정인에 대한 지긋한 애정을 남겼다고 전하는데 곡진한 속내를 조심스레 읽어 보는 대목이다.

퇴계선생은 매화를 끔찍이 좋아하여 매화에 대한 시가 백수가 넘는다 하니 가히 매화사랑이 지극하신 분임에 틀림없다. “매화가 아담하여 속기가 없고 추운 때에 더욱 아름다우며, 호젓한 향기가 뛰어나고, 격조가 높고 운치가 남다르며, 뼈대는 말랐지만 정신이 맑고, 찬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면서도 곧은 마음을 고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막 부풀기 시작하는 앙증맞은 매화꽃눈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다. 사나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은 오는 것이라고 속삭이고 있다. 꽃은 또 무심히 피어나겠지만 매화나무 아래서 나는 또 얼마나 떨리는 마음으로 설레일 것인지.

세상에는 하고 많은 꽃이 있지만 나는 매화를 제일로 치고 좋아한다. 홍매, 백매, 청매 등 꽃빛깔도 창호지문에 박힌 꽃잎처럼 아른아른 스며드는 기분이다.

고목나무에서 피는 꽃을 고매라 해서 그 가치를 더욱 높게 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연륜이 쌓일수록 인품을 귀하게 지니신 분을 대하면 절로 존경의 마음이 드는 이치와 같겠다.

고목나무 둥치에서 나온 가지에 매화꽃이 송이송이 매달려 새라도 날아들어 화조가 조화를 이룬다면 운치가 넘쳐 그 품격이 한층 돋보일 것이다.

매화 앞에서는 모든 꽃이 주는 보편의 형상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예쁘다 아름답다 하는 이미지 이상의 무엇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젊어서는 꽃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처럼 어떤 시련에도 의연하게 살아야 하겠다. 봉오리 터져 빚어내는 그 지순한 빛깔과 지고한 향기로 살고프다. 세월이 흘러 연륜이 더해지면 식용, 약용으로 이로움을 주는 매실처럼 유익한 열매로 남고 싶다. 온 정성을 다해서 매화꽃 빛깔과 향기와 열매로서 살다가 가야겠다.

백자 항아리에 매화 한가지 꺽어 꽂아두면 그 운치란 절로 생겨나는 법이다. 지기라도 청하여 차라도 우려 마시며 담소하면서 한결 정취를 누릴 것이다.

어쩐 일인지 점점 추위를 많이 타게 되니 어서 이 겨울을 안녕하고 싶어진다. 눈속에 매화가 피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며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무던히도 서성인다.

황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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