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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4)<45>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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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6: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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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4)
<45>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7) 
 
김열규가 영화관에 갔다가 붙들려서 XX청년단 학생부 방에 꿇어 앉혀졌다. 깡패 두목은 “이 새끼 너부터 혼나야겠다.”고 한 뒤 의자를 박차고 김열규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우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김열규를 내던졌다. 몇 미터를 날아가던 김열규는 어깨를 바닥에 대고는 가볍게 구르며 일어나 앉았다. 학교에서 조금 배운 바 있는 유도 낙법을 적용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괴수가 악을 썼다. “이 자식 유도하는구나. 그럼 흠씬 두들겨패도 되겠네.” 김열규는 그 낙법이 오히려 독이 되어 날아왔다.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고야 말았다.

괴수는 두 다리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영화를 보러 다녀? 야, 이 자식아 공부 좀 해! 정 하기 싫으면 머리맡에 책이라도 놓고 자!” 훈계를 해댔다. 집으로 다리를 질질 끌며 돌아오는 내내 생각하다가 결론 내렸다. “야 이놈들아, 번지수가 다른 데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너네들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좋아. 앞으로 더 철저하게 그 말을 지켜주마.” 그날 그 폭도의 훈계는 김열규에게는 오늘까지 공자의 가르침보다 더 견실히 지켜지는 덕목이 되었다.

김열규가 중학 4학년일 때 보수동 새 책방이 생겨 한국소설이며 시집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이준 시집’이라는 얄팍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서는 정지용,이용악, 오장환, 이육사 등의 시는 한 두 편 읽었는데 이준이란 시인은 아직 들어본 일이 없었다. 이력은 그가 서울상대에 재학 중이라는 게 전부였다. 책장을 넘기는데 재미 있는 구절이 김열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쌍동밤 혼자 먹으면/ 남과 싸운대/ 그러면서 나는/ 사촌 누이와/ 쌍동밤/ 나누어 먹었다”이 대목이 너무 정답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정경은 김열규가 소학교 4, 5학년 겨울방학때 외가에 갔던 추억을 떠올려 주었다. 외할머니는 일족을 시켜 연을 만들어주게 했고 자치기할 자도 만들게 했다. 또 달걀 속에 찹쌀을 넣어 익힌 밥을 주었는데 그 맛이 오래도록 혀 끝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침시였다. 덜 익은 감을 소금물에 재어서 익힌 것이 침시다. 외할머니는 그걸 썰어서 단술과 함께 먹으라고 했다. 침시는 황금빛에 곱게 물든 하트모양이었다. 김열규는 나이가 들면 자기를 무척 따르던 사촌 누이에게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주리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김열규는 이준의 시를 흉내내어 첫 번째로 시를 썼다. “사촌 누이와/ 쌍동밤 나누어 먹으면서/ 내가 걸어주었던/ 황금빛 침시 목걸이!” 이렇게 김열규는 대학을 문과로 가기로 하는, 계기를 만나게 된 것이다.

김열규가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에 들어가던 그해 6·25가 났다. 6월에 학기가 시작되었으므로 입학하고 일주일쯤 되었을 때였다. 김열규는 가까스로 부산의 전시연합대학 출신이라는 이름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서울역에서 운좋게 마지막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름 내내 부산 부두에서 수송부대의 통역을 하고 나니 겨우 ‘피난대학’이 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쫓겨온 모든 대학교가 ‘전시연합대학’이란 이름 아래 하나로 모였다. 통틀어 고작 100여명! 광복동 거리의 동쪽 끝에 있던 영화관을 빌려 강의를 했다. 그러다가도 자주 자주 옮겨다녔다. 얼마후 연합대학이 해체되고 학생들은 소속대학으로 돌아갔다.

부산 대신동 산비탈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이라는 나무 간판이 걸린 판자집 한 칸이 그의 대학이었다. 판자집은 반으로 나뉘어 한 쪽은 도서관, 한쪽은 교수실과 교무처를 겸했다. 대한민국이 차지한 땅이라야 겨우 부산과 대구 일대의 경상남북도가 전부였던 판국,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도 대학생에게는 병역이 면제되어 있었다. 부산임시정부의 엄청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이었다. 김열규는 휴강이 잦은 오후엔 국제시장으로 갔다. 문방구에는 노트가 없었던 탓에 미군이 버린 휴지며 파지를 구해 노트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노천의 고물전에 수북이 쌓인 여러 물건들 가운데 미군이 쓰다버린 타이프라이터 용지를 골라냈다. 이면지 활용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종이를 훑어내다가 가끔은 뜻밖의 요행수를 만났다. 십중팔구 미군이 읽다 버린 책이며 잡지가 걸려들면 김열규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 가운데는 ‘새터데이 리뷰’(Saterday Review) 같은 문예잡지며 ‘애틀랜틱’(Atlantic) 같은 종합잡지도 끼여 있었다. 그런 책들을 뒤지다가 미국의 ‘신비평’(NewCriticism)을 알게 된 것은 대단한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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