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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배구발전 이끈 배구인들 열정을 찾아서
배구열전 <1>황승규 전 감독(전 경해여중 교장)
'배구도시' 진주 이끈 산파 역할
최창민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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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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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에는 배구인이 많다. 특히 진주는 인구 34만의 중소도시에 속하지만 배구팀이 중·고교 대학에 5개팀이 있을 정도다. 과거 경상대에서 배구부를 지도했던 이영웅 교수를 비롯해 신갑용 전 교장, 황승규 전 교장, 김양수감독 김형태 감독 등 걸출한 지도자 등 배구 주인공이 많다. 또한 국가대표를 지내며 국가의 위상을 더높인 강만수 하종화 윤종일 등 걸출한 스타들도 있다. 이에 본보는 경남 출신으로 경남의 배구발전에 그 역할을 담당했던 배구인을 중심으로 이들을 조명하는 배구열전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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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규 전 배구감독

황승규(66)전 경해여중 교장은 배구인으로서 학교장까지 역임한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다. 진주가 배구도시라는 명성을 가질 수 있는 산파역할을 했다.

1978년도 진주 배영초등학교배구부 창단을 비롯해 동명중학교, 선명여중(현 경해여중), 선명여고 배구부를 잇달아 창단해 팀을 이끌었다.

진주 배구의 기초와 허리를 만드는 역할을 한 셈이다. 특히 여자배구의 육성과 발전에 산파역을 훌륭하게 수행해 냈다. 그는 지역사회에서 이 같은 업적을 인정받으면서 경해여중에서 교장직까지 수행한 뒤 지난해 퇴임했다.

황승규 전 경해여중 감독(66·이하 황승규 감독)은 여자배구선수들을 육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동명중학교 감독시절에는 우리나라 국가대표 최고의 에이스로 활약한 하종화·윤종일을 지도했고, 곧이어 여자 중·고교에서 선수들을 길러냈다. 대표적으로 김애숙, 배정자, 정미나(전 청소년국가대표), 김은영, 성은숙 선수 등이 그들이다.

황 감독은 여자 중·고교 배구 총감독으로 살아온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스포츠에서 팀을 이끌어 성공한다는 것은 혼을 불어 넣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여자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은 신체적인 조건 등으로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더욱 신경써야 합니다. 25년 동안(1983∼2012년)아무 탈 없이 지도자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선수들에게 진심을 보여줘야만 팀이 정상궤도에 선다. 무슨 일이든 다 그렇지만 사심이 작용하면 이미 지도자로서 자격을 잃은 겁니다. 예로 운동이 하기 싫어 이탈한 선수들을 데려 오기위해 며칠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아낸 뒤 설득해 데려온 적도 있다”고 말했다.

▲배구감독 시절 전성기와 기뻤던 일에 대해 물었다. “진주에서 열린 종별 선수권에서 선명중학교와 선명여고가 전국대회에 출전해 동시에 우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최고의 전성기였지요. 우승한 기분에 젖어 선수들과 함께 기뻐했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서는 마산의 제일여중·고교 배구부와 선의의 경쟁을 할 때를 언급했다.

“마산 제일여고가 강팀이었는데 언제나 선명여고와 맞붙는 것이 스트레스였습니다.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경기를 할 때마다 긴장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어요. 전국대회에 나가면 우승과 준우승을 했는데, 오히려 지역예선이 더 힘들었고, 그때마다 제일여고와 항상 어려운 경기를 했다”고 말했다. “경쟁이 심할 때는 선수 수급을 위해 마산 쪽에서 배정자 라는 선수를 데려왔는데 이것이 상대방을 자극해 양측 간 감정싸움이 되고 지역 언론사도 가세해 지역간 갈등까지 비화될 정도로 심각해질 때도 있었다”고 말하는 그는 진주와 마산지역민들은 배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다른 도시에 비해 남달랐다고 한다.

▲평생 배구 인생을 살아오면서 보람도 많았다고 한다. “배구를 하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고향 어르신들을 모시고 1일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창녕 부곡하와이에 가서 사우나를 시키고 작은 선물까지 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기뻐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뒤에 마을 어르신들에게 감사패를 받았는데 그때 받은 감동을 생각하면 보람이었다”며 밝게 웃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운동을 해서 성공하지 못하거나 성공하더라도 진로를 바꿔야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도한 배구선수들은 새로운 길을 선택하고서도 남들이 부러워 할 만한 직업을 선택해 성공하는 예를 많이 보았다. 이는 배구를 할 때 근성이 인생에도 적용된 결과다”며 미국에 유학해서 한의사가 된 정미나(전 청소년국가대표),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해군사관학교에 출강하는 김은영, 대학 강단에 선 성은숙씨를 예로 들었다. 그는 “더 열심히, 더 강하게 운동한 사람들이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성공하는 것 같다”고 조언했다. 황 감독은 요즘도 제자들과 교류하며 살고 있다며 뿌듯해 했다.

▲열정, 그리고 기억나는 선수에 대해 사연을 소개했다.

황 감독은 “김애숙이라는 성장 가능성이 있는 선수가 있었는데 데려오기 위해 그 집에 가서 밤새도록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래도 안돼 그 집에서 잠을 자고 밥까지 얻어먹으며 데려 올 수 있었다”며 열정적으로 살았던 시절을 회고했다.

배정자의 경우 집이 김해라는 것과 어머니의 성함이 김귀남이라는 사실만 알았을 뿐 집 위치를 몰랐는데 김귀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집의 주소를 모조리 찾아내 장유에서 찾아냈던 일화도 소개했다.

1980년대 후반 한국배구의 대들보 역할을 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하종화(현 동명고 체육교사)와 윤종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하 감독은 성격이 온화한데다 머리가 명석해 경기에서도 두뇌플레이를 했다. 큰 체구에 비해 빠른 운동감각을 갖고 있어 중학교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다”고 기억했다.

윤종일씨에 대해서는 “타고난 실력을 갖고 있었으나 사춘기의 방랑끼가 발동해 가끔씩 운동을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며 특히 “그럴 때는 선수를 찾으러 다녔는데 주로 만화방에서 데려왔다”고 웃음을 지었다.

▲지난해 학교를 떠난 뒤 산청에 작은 집을 짓고 조용히 지내고 있는 황 감독은 “가끔 진주시내에 나와 배구인들과 식사를 하며 교류하고 있다”며 근황을 전했다.

황 감독은 이어 “요즘 후배감독들이나 선수들이 프로배구 무대에서 훌륭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뿌듯하다”며 “더욱 정진해 진주배구 발전에 힘써주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황승규 감독은 1949년 진주 대평에서 태어났다. 동명고교 2학년 때 배구를 시작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9년 실업팀인 동양나일론으로 갔다. 대학을 가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 교사의 월급이 2만5000원이었는데 실업팀에서 3만5000원을 주겠다는 말에 선뜻 승낙을 해버렸다. 대학을 졸업한 교사의 월급보다 많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선택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군 생활을 마친 뒤 이때부터 감독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코치라는 말보다 감독이 좋았다.

1978년 진주로 낙향했다. 경상대에서 배구부 코치 겸 대학 진학을 제안했기 때문. 동시에 진주배영초등학교 배구부도 창단했다. 당시는 늦은 나이에 대학진학과 코치생활이 동시에 이뤄졌다. 경기에 나서야 했으며, 지도도 해야 했고, 공부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서 초등학교 배구부 감독까지 맡아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배영초등학교가 창단 2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했다. 이후 25년 동안 진주동명중, 선명여중, 선명여고 배구부를 잇달아 창단하고 팀을 이끌면서 수 십차례에 걸쳐 우승트로피를 들었다. 2008년 9월 1일 선명여중 교장에 취임한 뒤 지난해 퇴임했다.
선명여고배구부
진주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에서 선명여고 배구부가 우승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 황승규 감독(당시 교장). 뒷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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