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불태운 산, 무성한 잡목이 생을 잇다
불안을 불태운 산, 무성한 잡목이 생을 잇다
  • 최창민
  • 승인 2014.02.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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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선정 100대명산 <90>수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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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바위 뒤쪽 웅장한 산세. 난공불락 요새 주변에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생활이 가능한 평탄지 구렁지에 샘터 돌확 등이 있다.
산이 높다고 좋은 산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당연한 얘기지만 낮은 산이라도 볼거리와 느낄거리가 많다는 얘기다. 89회차 천반산의 경우가 그랬고 이번에 찾아가는 수인산도 그런 류의 산이다.

수인산은 높이가 561m에 불과하지만 산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로 신비롭다. 원시적인 느낌이 드는 산성 유적지와 비대칭으로 울퉁 불통하게 곧추 선 병풍바위, 남근석 홈골 등이 어울려 특이한 산세를 이룬다. 산 중 수인산성은 고려 때부터 축조한 것으로 일부 훼손됐으나 아직도 성의 면모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병마절도사영에 소속되면서 보강 축성됐고 한국전쟁 때도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산세가 험준한 난공불락, 천연의 요새이자 아름답다는 반증이다. 성안에는 봉화대 막영지 등 군 시설을 비롯해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집터와 우물, 곡식을 빻거나 갈수 있는 돌확, 절구통, 맷돌 등이 흩어져 있다. 고루한 삶에도 낙망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았던 옛 사람들의 가슴 찐한 메시지가 산 속 곳곳에 서려 있다. 작금, 평화의 시대 힐링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다.

이 산 아래 병영면 남성리에는 전라병영성지가 있고, 조선을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한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의 흔적도 남아 있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으로 1653년 해상무역을 위해 타이완을 거쳐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큰 풍랑을 만나 제주에 표착했다. 그리고 이곳에 배속돼 7년(1656∼1663)동안 생고생하다가 본국으로 탈출했다.

▲수인산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과 강진군 병영면 경계에 있다. 높이 561m이지만 산세가 웅장할 뿐 아니라 아름답기 그지없다. 남서쪽 외부는 비럭과 바위벽으로 구성돼 있고 정상부근에는 평평하거나 구릉지가 형성돼 있는 특이한 지형이다. 산성이 있었던 이유이다. 산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며 능선을 따라 자연적인 결대로 쌓았다. 총 길이는 6㎞이다.

▲산행코스는 지로마을→홈골저수지→수인사→헬리포터→서문→남문→병풍바위(반환)→수인산 정상(노적봉)→북문→동문(반환)→도둑골→홈골저수지 회귀→하멜기념관. 약 7㎞에 휴식포함 5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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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산 도둑골 방향에서 바라본 하늘금. 멀리 왼쪽부터 홈골, 병풍바위 남근석 명문을 새긴 바위가 보인다.


▲오전 9시 22분 병영면 지로마을을 지나고 논 사이로 난 시멘트로를 따라 홈골저수지 둑방 배수로 부근 주차장에 도착한다. 역광에 물비늘이 반짝이는 수면 위 동쪽에 검은 바위산이 수인산이다. 여기서는 2개의 등산로가 있다. 홈골제 옆으로 난 임도를 따라가면 수인사를 거쳐 병풍바위와 남근석사이로 곧장 오르는 짧은 길이고, 오른쪽 길은 시계반대방향으로 휘돌아서 병풍바위로 오르는 길이다. 취재팀은 홈골 저수지→수인사로 방향을 잡았다. 수인사는 가정집 같은 암자분위기가 난다.

작은 물길 건너 ‘병풍바위 1.3km’ 이정표를 따르면 산길이 열린다. 겨울에 초록색이 화려한 갈참나무벌레집이 시선을 끌뿐 특이할 것 없는 등산로다. 20분 만에 만나는 무덤에 석물. ‘무덤을 지키라’는 의미인 듯한데 호랑이석물이 산을 향해 포효하는 모습이다.

산행 들머리서부터 뒤를 돌아보게 된다. 눈 내린 설산처럼 허연 바위 산의 위용을 보여주는 영암 월출산 때문이다.

출발 40여분만에 헬리포터를 지나 산으로 향하면 눈 위로 오른쪽 병풍바위, 왼쪽 쭈뼛한 남근석이 가깝게 다가온다. 등산로는 이 사이로 연결되는데 해발 450m지점으로 수인산성 서문이 된다.

오전 10시 22분 서문에 올라서면 100여평 규모의 공터. 곳곳에 기와편과 절구통 샘물까지 있어 서문터임을 짐작케 한다. 2층짜리 건물 높이의 바위 2개가 두부 잘린 것처럼 서 있는데 반반한 벽면에 크고 작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낸 인물의 이름들이다.

오른쪽 언덕길을 넘어 가면 이번에는 서문보다 더 넓은 평평한 구렁이 나온다. 역시 기와편이 많이 널려 있고 그럴듯한 우물과 대형 맷돌까지 있어 큰 건물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갈림길에서 다시 오른쪽 남쪽으로 5분정도 비스듬하게 오르면 남문. 그 옆에 가슴뚫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병풍바위 뒤쪽에 우람한 바위 경관이 절경이다. 주왕산의 바위 일부를 옮겨 놓은 듯 한데 거침없이 자유로운 하늘금, 원시적인 형상에 감탄사가 나온다. 다시 되돌아와서 수인산 방향으로 방향을 튼다.

정상 노적봉에 가려면 고도를 살짝 낮췄다가 다시 높인다. 등산로상의 왼쪽에 산성의 흔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부분적으로 끊어진 곳도 있고 온전한 것도 있다. 인근에 있는 바위들을 끌어 모아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선인들의 고달팠던 삶이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힘이 들어도 어떻게든 성벽을 쌓아 왜구의 침입을 막고 무사태평한 안위의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으리라.

바닷가 해안의 상징 동백나무가 몇그루가 보인다. 차나무는 야생인지 심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산에는 큰 나무들이 별로 없다. 성장속도가 빠른 나무들만 구렁지대에서 조금 보일 뿐 대부분 잡목들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한국전쟁 때 빨치산 소탕을 위해 비행기에서 기름을 뿌려 산 전체를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은거지를 찾기위해 정글에 고엽제를 마구 뿌렸던 이치와 같다.

오전 11시 22분 노적봉 정상 봉수지에 닿는다. 서쪽에 영암 월출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 수 천만평의 작천평야가 펼쳐져 있다.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 자연재해를 막아주는 천혜의 곡창지대다. 동북쪽 가까운 곳에 탐진강 그 위에 장흥댐이 있고, 동쪽 먼 곳에 봄철 철쭉이 아름다운 제암산이 보인다. ‘수리봉 4.2km 수인산성 동문 1.5km’ 이정표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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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과 성터


취재팀은 수인산성 동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고도를 한껏 낮춘다. 이번에는 정상 노적봉을 중심으로 남쪽에서 북동쪽으로 돌면서 수인산 성터를 밟고 가는 구간이다. 북동쪽 방향 동문지점 못미친 지점까지 갔다가 휴식한 뒤 갈림길로 다시 돌아왔다.

오후 1시 20분,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지나왔던 수인산 안부이기 때문에, 하산길은 오른쪽 도둑골로 잡아야 한다. 하산 길에서 최고의 전망을 만날 수 있다. 오름길에서는 잡목 때문에 가려졌던 병풍바위와 남근바위 하늘금을 자세히 볼수 있다. 고도를 낮추면서 내려오면 두 세곳의 사진촬영포인트가 있다. 또한 특이한 지형 홈골도 보이는데 마치 산 일부가 밑으로 꺼져 버린 형태이거나 용암이 흘러내린 자국처럼 거대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다.

하산길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흔한 국산 토종난은 벌써 초록의 색소가 선명한 봄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홈골 저수지 개울가 양지에도 버들강아지가 살이 올랐다. 오후 2시 22분을 가리켰다.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 호르큄시 출신의 헨드릭 하멜은 일행 36명과 함께 1653년(효종4)상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에 표착했다. 제주목사 이원진은 일단 이들을 감금한 뒤, 당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해 한양에 살던 박연을 통역으로 데리고 와 그들의 정체를 알아냈다. 졸지에 이역만리 제주에 표착한 하멜 일행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656년 전남 강진으로 유배된다. 이때부터 전라병영성에 배속돼 7년 동안 고된 노역을 하며 힘겹게 살았다. 흉년이 들 때면 구걸까지 했다. 너무 힘든 나머지 탈출을 시도했다가 다시 잡히는 바람에 죽을 고비도 넘겼다. 결국 1666년 탈출에 성공해 일본을 거쳐 모국으로 돌아갔다. 하멜표류기는 그가 돌아간 뒤 소속사 동인도회사를 상대로 ‘그동안 밀린 임금을 달라’고 청구하는 과정에서 13년간 조선생활을 소명자료로 기록, 제출한 것이다. 이른바 ‘난선제주도 난파기보고서’다. 이는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으로 출간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강진군은 하멜 일행이 7년 동안 강진 병영에서 생활한 것을 기념해 1998년 하멜의 고향 호르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2007년에는 병영면에 하멜 기념관을 개관했다. 2012년 히딩크가 이곳을 다녀갔다.

한국을 월드컵 4강에 올려놓은 영웅 히딩크는 자신이 감독직 수행을 위해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오대영’이라는 별명을 얻는 등 어려웠던 상황을 400여년전 하멜이 조선에 표류한 뒤 어렵게 살았던 사실을 절묘하게 비유해 국민들의 공감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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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부근 성터를 지나는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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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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