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7)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7)
  • 경남일보
  • 승인 2014.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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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0)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7)
<48>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0) 
 
작년(2013) 12월 16일 오전 김춘랑 시조시인은 향년 80세로 고성 자택에서 타계했다. 김 시조시인은 고성의 터주대감으로 끝까지 고향을 지킨 사람이었다. 본명은 김태근이었고 김녕김씨임을 자랑했다. 고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통신강의록으로 독학했고 마산법학전문학관 2년 수료했다.

문학활동은 1958년부터 이문형, 최진기, 남정민, 최우림, 서벌 등과 ‘영번지’ 동인으로써 첫출발을 했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된 멤버들과 활동한 것은 김교한, 박재두, 이금갑, 서 벌, 김호길, 조오현 등과 ‘율’(律) 동인회에 가담한 것이 스스로의 이력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일찍이 한국예총 고성지부장에 선출되어 거의 평생을 문협지부장과 예총지부장을 번갈아 가며 고성의 권력없는 예인으로 일관했다. 1968년 ‘시조문학’(이태극 발행)지를 통해 3회추천을 받아 시조시단에 데뷔했다. 그 이후 ‘현대문학’ ‘사상계’ 등에 시조를 발표했는데 그가 데뷔 초기에 유수한 문예잡지에 시조를 발표할 수 있은 것은 거의 예외에 속한다. 이는 그의 양성적이고 밀어붙이는 성격이 잡지 편집인을 붙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김춘랑은 시조시인들이 ‘촐랑이’ 또는 ‘촐랭이’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그는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성격이 그만큼 어떤 형용이나 수사에 매이지 않고 폭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문단정치에도 잘 휩쓸려 다녔다. 1970년대 초반이었을까? 김동리와 조연현이 한국문협 이사장 자리를 놓고 문인직선을 하던 때에 그는 고성이나 주변의 표를 몰아 서울행 열차를 탔다. 그의 거침없는 언술은 이런 때에 적합하여 출마자들이 마부로 활용하는 데는 적합한 인물이었다. 당시 김동리는 연조가 있는 문인들이 선호했고 조연현은 젊은 작가 시인들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경남의 경우 대부분의 문인들, 합쳐야 10명 안팎이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조연현이었다. “k선생 쪽 저느마들, 저래봐야 표떨어지는 짓만 하고 다니지. 탁 그만 찌그러터려 놓아비릴 끼다!” 말이 거침없고 흐름이 속도가 있어 선거판 화술로는 제격이었다. 김춘랑은 자기가 선거운동하는 것이 분명하고 다른 문인들처럼 선거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닌, 기회주의자들의 태도에 대해 “허약한 놈들!”하고 직사포를 던졌다.

그는 늘 술이 붙어다녔다. 호주가였다. 누굴 달고 나타나도 그 사람도 술꾼이고 누굴 찾아 나서도 그 찾는 사람도 술꾼이었다. 술판이 벌어지면 그는 입이 싸고 천하에 행복하여 그 행복의 말은 ‘쌍시옷이나 지읏자’가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는 광주 민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욕잔치에 나가 으뜸상을 받기도 했다. 어느해 광주 금호문회회관 강당에서 열린 ‘욕을 살립시다’행사에는 ‘맛있는 욕’을 얻어먹으려는 500여 청중이 몰려들었다. 광주민학회 박선홍 회장은 “욕이 사라지면 생활이 윤기를 잃는다. 욕을 감정표현의 저급한 수단으로써만 여길 것이 아니라 생활 감정 속에 욕이 어떻게 살아 있나를 정면으로 다뤄보는 것이 좋아 이 대회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대회 취지를 밝혔다.

이날 행사장에는 욕들이 넘쳐 흘렀다. 그러나 그 욕들은 경연 참가자들의 입에서 나온 것보다 그경꾼들에게서 오히려 욕다운 욕이 나왔다. 참가자 10명 가운데 김춘랑은 으뜸상을 받았는데 “날강도 찜쪄서 안주 삼고, 화냥년 경수 받아 술 빚어먹고, 피똥 싸고 죽을 남원 사또 변학도와 사둔해서 천하 잡놈 변강쇠 같은 손주 볼 놈”이라는 욕설을 퍼부어 큰 박수를 받았다.

술좌석에서 언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시조작품을 두고 벌이는 건설적인 언쟁으로 박재두와의 언쟁이 대표적이다. 최근작을 대상으로 하여 한동안 상대방 작품의 약점을 두루 파뒤집다가 결국에 가서는 “잘났다, 박재두 니가 이겼다”하고 손수건을 던졌다. “그 대신 네가 그린 동양화 한 점 내놔!”하며 박재두의 서재 이곳 저곳을 뒤져 그리다 만 작품을 찾고는 “이기라도 가져가야 쓰것다”하고는 유유히 서재를 나섰다. 나가면서 “재두 시인, 오늘은 내가 졌다! 다음에 보자.”하고는 여운을 남겼다. 시인의 기질은 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김춘랑에게서 그 시인적 기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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