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남강 절벽 바위글씨 인물 열전 <1>
진주 남강 절벽 바위글씨 인물 열전 <1>
  • 최창민
  • 승인 2014.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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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직·한규설·정일용·채규상·김재은 편
진주성 촉석루 아래 남강 절벽 바위에는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인 구한말 격동의 시기를 살다간 인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특히 바위글씨의 주인공들은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의 근대계몽기에 진주권과 인근지역에서 경상우병사·관찰사·군수·부사 등 고위직을 지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바위글씨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인물들은 40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나, 지금까지 29명(동일인 추정 포함)의 이름만 확인됐다. 이에 따라 바위에 새겨진 인물은 물론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 바위글씨의 주인공에 대한 추가 발굴 작업, 그리고 바위글씨의 문화재적 가치 연구 등 다각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 이에 본보에서는 현재 남강 절벽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바위글씨의 확인된 주인공들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1>한규직·한규설·정일용·채규상·김재은 편

진주 촉석루 아래 절벽 맨 왼쪽 남강쪽으로 돌출한 바위 정면에 단아한 필치로 인물 5명의 이름이 각인돼 있다. 이 바위에는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한규직·한규설·정일용·채규상·김재은 등 5명의 이름이 크게 한자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한규직(韓圭稷·1845~1884)

한규직은 1870년 7월 함안군수에 임명되었고, 부임한 이후에는 환곡의 병폐를 정리하고 성곽을 정비·수리하는 등의 치적을 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872년 6월 상주진영장으로 전직될 때까지 2년간 함안군수를 맡았다.

이름의 각자 시기는 1884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자 시기가 함안군수를 재임하고 있던 때가 아니라 함안군수에서 떠난 후 12년이나 지난 1884년에 이름이 각인된 것은 그 시기에 주민들이 경상우병사로 재임하고 있던 동생 한규설의 이름을 새기면서 12년 전 함안군수를 했던 형 한규직의 이름도 새겼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바위 표면에 두사람의 이름 각자 오른쪽 작은 글씨로 ‘임신소제(壬申所題)’가 새겨져 있는데다 이름 각자의 필치도 같아 동일한 시기에 새겨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규직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1845년 한양에서 태어나 1884년 갑신정변 때 반대파에 의해 살해됐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순좌(舜佐), 호는 다옥(茶玉), 시호는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받았으나 훗날 충숙(忠肅)으로 고쳐졌다.

한말에 참정대신을 지낸 한규설(韓圭卨)의 형이다.

1864년(고종 1) 19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된 뒤, 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함안군수·상주진영장(尙州鎭營將)·경흥부사·금위영천총(禁衛營千摠)·길주목사·경상우수사 및 좌수사 등 외방의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1881년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된 뒤 곧이어 좌변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

순안에 유배되었다가 임오군란(1882년 6월 9일) 이후 국왕의 특명으로 풀려나, 좌포도대장에 임명되었고, 이어 우포도대장·총융사(摠戎使)·어영대장이 되었다. 권지협판(權知協辦)이 되고 다시 공조판서·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군무사(軍務司)를 거쳐 신설 교련소인 친군전영(親軍前營)의 감독까지 겸임하였다. 1884년 초에는 다시 기기국(機器局)과 혜상공국(惠商公局) 총판을 겸하였다.

전영사(前營使)가 되어 이전에 별도 설치된 연융대(鍊戎臺)를 통해 모든 군사 훈련을 통할하였다. 이때 그 동안 박영효(朴泳孝)가 양성하던 신식 군대까지 친군전영에 편입, 개화파로부터 군권을 빼앗아 이때부터 개화당과 반목하는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1884년 12월, 개화당이 우정국 낙성 축하연을 이용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피신, 병졸로 변장하고 창덕궁으로 가 국왕을 만나려 하였다. 그러나 김옥균(金玉均)의 방해로 퇴궐하다 경우궁(景祐宮) 문전에서 이규완(李圭完) 등에게 살해되었다.
 
▲한규설 생사당 건립지로 추정되는 진주성 서문안. 오태인기자

◇한규설(韓圭卨·1856~1930)

한규설은 1884년 4월 28세의 젊은 나이에 진주성에 소재한 경상우병영 경상우병사에 부임했다. 1885년 8월까지 1년 4개월동안 경상우병사에 재임했다.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시기는 형 한규직의 이름이 새겨진 시기와 같이 1884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름 각자 왼쪽에는 ‘갑신안월(甲申按鉞)’이라는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안월’은 부월(斧鉞)을 쥔다는 말로 병사를 뜻한다.

한규설은 재임기간동안 삼정문란의 폐단을 제거하고, 창렬사를 중건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특히 세금 경감 등 서민을 위한 정책으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세금 경감 혜택을 받은 7개 마을의 보부상들이 1887년 2월 비봉산 아래 치적비를 건립했으며, 현재 이 치적비는 진주성내에 소재하고 있다. 진주성 서문안에는 선정을 기리는 생사당도 건립됐다. 생사당은 살아있는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을 말한다.

한규설은 1856년 한양에서 태어나 1930년 생을 마친 애국지사다. 을사늑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타계할 무렵에도 자신에 대해 “식지 않는 송장(未冷屍)과 다름없다”며 강개한 심경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순우(舜佑), 호는 강석(江石)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좌수사·경상우병사·금군별장(禁軍別將)·우포도대장(右捕將)을 역임했다.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던 유길준(兪吉濬)을 보호하면서, 그의 저서 ‘서유견문(西遊見聞)’ 집필을 도와, 완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뒤 친군우영사(親軍右營使)·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을 거쳐 형조판서·한성부 판윤·우포장·형조판서·한성부 판윤·친군장위사(親軍壯衛使)·연무공원판리사무(鍊武公院辦理事務)·총어사(摠禦使)·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을 맡았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이어 이듬해 다시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찬정을 거쳐 1905년 의정부참정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각했다. 그런데 당시 일제가 전권대사 이토(伊藤博文)를 앞세워 을사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끝까지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이에 일제는 갖은 협박을 가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대궐 수옥헌(漱玉軒) 골방에 감금하고 본관(本官)을 면직시켰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곧 징계에서 풀려나 중추원 고문·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강제로 국권 피탈 후에 남작(男爵)의 작위가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이후 칩거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창립하였으며, 그 뒤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로 발전시키는 등 애국활동을 전개했다.

◇정일용(鄭鎰溶·1862~?)

남강 절벽 맨 왼쪽 바위의 5명의 바위글씨 이름 중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정일용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하강진 동서대 교수의 연구논문에 따르면 정일용은 1891년 진사시에 합격해 상농공부 주사·내부 치도국 참서관 등을 지냈고, 1908년 2월 김해군수에 부임해 1908년 8월까지 재임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름 각자도 어느 때 새겨졌는지 알 수 없다.

◇채규상(蔡奎常)

오른쪽에서 4번째로 새겨져 있는 채규상은 경상우병사 재임시 많은 치적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각자 시기는 채규상이 경상우병사에 부임한 그해인 1891년에 새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각인된 이름 왼쪽에 ‘신묘무융(辛卯撫戎)’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신묘년은 1891년이다.

채규상은 선전관·영암군수 등을 거쳐 한규설의 장인 박규희의 후임으로 1891년 1월 경상우병사에 부임했다. 1892년 12월 총어영 별장에 임명돼 진주를 떠날 때까지 한 채규상은 2년간 많은 치적을 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임시절 경상감영에서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았으며, 참모들이 사사로이 물건을 매입하는 잘못된 처신을 엄격하게 처단한 사실이 사서에 기록돼 있다.

◇김재은(金在殷)

남강 절벽 바위 맨 왼쪽에 각인된 김재은은 1884년 10월 6일 고성부사에 임명된 뒤 1885년 6월 23일 선전관 가설에 제수돼 9개월 가까이 고성부사로 재임했다. 이름이 각인된 시기는 김재은이 고성부사를 그만둔 이후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름 왼쪽에 ‘을유맹추제(乙酉孟秋題)’라고 부기돼 있어 1885년 7월에 이름이 새겨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김재은은 고종 때 문신으로, 고성부사를 비롯해 선전관·장위영 병방·병조참판·시위대 대대장·중추원의관(정3품)을 거쳐 가선대부(正二品嘉善大夫·정2품)로 충주군수 서주임관1등(敍奏任官一等) 등을 지냈다. 특히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는 김재은(金在殷)의 선정비가 서 있다. 묘갈형으로 상단을 둥글게 처리한 높이 140㎝ 정도인 이 선정비의 비면에는 ‘행군수김공재은애민선정비(行郡守金公愛民善政碑)’라 쓰여 있다. 내부대신육군부장훈1등(內部大臣陸軍副將勳一等) 이지용(李祉鎔)이 발급한 충주군수로 임명받았을 때의 교지(敎旨)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전한다.

최창민기자
자료 제공=하강진 교수(동서대 영상문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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