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8)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8)
  • 경남일보
  • 승인 2014.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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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1)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8)
<49>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1) 
 
김춘랑은 일생 한 번도 자기 집을 가진 바가 없었다. 생활이 늘 펴이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래도 초기 고성지역 경남도의원에 출마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돈이 없으니까 늘 몸으로 때웠고 선거운동원도 없이 맨몸으로 뛰었던 것 같다. 선거는 조직이 있어야 하고 운동원이 움직여야 하고 정치적 도량과 식견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런 기반도 없이 지역의 문화예술운동의 이력을 밑천 삼아 지역민들이 막연하게 알아주겠지 하고 선거판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 무렵의 지방신문들은 합동 유세때 김춘랑 후보는 때때로 시낭송을 하여 울분을 토했다라는 기사를 쓰고 있었다. 선거는 현실인데 현실적 여건이 주어지지 않는 데서 유권자의 보편적 투표 성향을 파고 들 수는 없지 않았나 싶다. 요즘 선거판처럼 출판기념회가 성행했더라면 시인은 좀 유리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우선 문장이 되고 감성으로 유권자를 일정 부분 자기 쪽으로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시낭송은 그것대로 잘 훈련된 청자일 경우 수용도가 높다. 우리나라의 시낭송운동은 지금 활발하여 시낭송가협회가 만들어질 정도이고 웬만한 문화제에는 시낭송겨루기를 개최하여 전국권 싹쓸이 참가자들이 생겨나 도맡아 상을 가져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김춘랑이 지금 출마한다면 소정의 반응을 기대할 법도 하지만 그 무렵에는 아직 낭송 분위기가 잡혀져 있지 않을 때라 선구자는 더더구나 시골에서 홀대받기 마련이다.

각설하고 선거판 출판기념회가 있었다면 김춘랑은 오히려 기념회를 거부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전국의 6·4지방선거를 앞두고 때아닌 출판기념회 풍년이라는 이색적인 풍경에 접하면서 여러 생각들을 하는 중이다. 과연 이 출판기념회의 출판된 책이 나라의 언어와 표현에 힘을 보태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정치 선진화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한 시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정치가 지나가고 난 뒤에 이 비평적 작업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하리라 본다. 김춘랑이 기념회를 거부했을 것이라는 짐작은 그에게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저항적인 데 서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도중 멕시코에서 김춘랑과 함께 ‘율’동인을 같이 했던 김호길 시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김호길 시인은 사천 출생으로 미국과 멕시코를 드나들며 농업 무역도 하며 영농법인 ‘해바라기농원’을 설립 멕시코 현지법인을 경영해왔는데 최근에 고문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아들에게 인계, 지도하고 있다. 한 번은 귀국했을 때 세계에 한국의 시조를 널리 알리고 쓰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그 결과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봉곡동에서 식당 점심을 끝낸 뒤에 친구 B군과 필자에게 공히 백달러씩 기념으로 주고 갔다. 김호길의 ‘율’ 동인 이야기를 좀더 할 필요를 느낀다.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지만 김춘랑의 아들을 김호길의 농장에 취업을 시켰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는데 그 이후 귀국했는지 아직 일하고 있는지는 확인한 바가 없다.

김호길은 우리나라 시조시단에서는 특이한 존재로 부각되어 있다. 64년쯤 진주농과대학 재학중에 입대하여 육군항공학교를 수료했고 그 바람에 월남전에 헬리곱터 조종사로 파견되어 생사를 넘는 능선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제대하고는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국제선 조종사로 근무했는데 시인이 조종사라 하여 인기가 대단했다. 그런 뒤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거기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집은 L.A에도 있고 멕시코에도 있다. 다음 이야기는 김호길이 기억해낸 김춘랑과 관련된 ‘율’ 창립기 이야기다.

시조 동인회 ‘율’을 조직한다는 소문이 중앙일보 문화면에까지 전달이 되었을까. 문화부 기자 최종율이 서 벌, 김춘랑 원판수(한전)가 살고 있는 고성을 방문했다. 1965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서 벌은 ‘하늘색 일요일’이라는 시조집을 갓내었을 때였다. 박재두 시인은 사량도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인터뷰 초점은 서 벌 시인에게 잡혀져 있었다. 서 벌은 그중에서 좌장격으로 도깨비와 같고 엉뚱하고 특이하게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이었다. 최기자의 앵글에 잡힌 것은 풀짐 지고 보릿대 모자를 쓰고 논두렁길로 오는 서 벌의 모습이었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시조 창을 하는 듯한데 무슨 시조일까는 알 수가 없는 표정이다. 힘드는 모습으로 보면 양사언의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이거나 정철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정도일 것으로 추측은 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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