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그대로 인데 인연은 사라져가고…
자연은 그대로 인데 인연은 사라져가고…
  • 경남일보
  • 승인 2014.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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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남해 금산 이성계기단과 부소대
2보리암
보리암

 
 
새봄을 알려오는 봄의 향기는 흙냄새에서부터 일어나는지 갯바람을 가르며 작은 섬들을 교각삼아 섬과 섬을 제각기 다른 모양새로 잇고 있는 삼천포·창선대교를 건너서자 겨울의 끝자락인 꽃샘추위도 꼬리를 사리고 온갖 봄내음이 사방에서 묻어오는데 상큼한 풀냄새와 비릿한 갯내음은 코끝에서 맴돌고 은근하게 야릇한 흙냄새는 겨우내 여몄던 오지랖을 헤집는다. 인생사 잊혀진 사연들이 한둘 이겠냐만 풀잎피고 새잎 돋으면 아련한 옛이야기도 되살아난다. 우수경칩 지나고 춘분이 다가오면 20여년을 두고두고 미안해하는 사연이 있어 남해 금산의 부소대를 찾아서 길을 나섰다.

남해섬의 주산인 금산의 뒷길을 가파르게 굽이돌아, 작은 주차장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보리암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정상의 우람한 바위들이 근엄한 자세로 정중하게 반기고, 발끝 아래로는 골과 등을 가리지 않고 무덕무덕 기암괴석들이 겹겹으로 떼를 지워 울쑥불쑥 솟았는데, 보리암 절집은 용마루의 허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육중한 몸집을 서서히 들어내며 상주 앞바다를 지긋하게 밟고서 일망무제의 만경창파에 세존도를 띄웠다.

낙산사의 홍련암과 여수의 항일암과 더불어 남해의 보리암을 우리나라 3대 해수관음기도도량의 성지라 해서인지 찾는 이의 발길이 줄을 잇는데, 덩달아서 경건해 지는 까닭은 관음보살의 가피인가 산신의 정기인가 옷매무새에 손길이 절로 간다. 보광전의 본존불은 자그마한데 풍기는 자애로움이 향불의 연기를 타고 법당 안이 가득하여, 정성을 다해 예를 갖추고 나와 벼랑끝의 돌계단을 밟으며 산신각에 들려서 찾은 뜻을 아뢰고, 우선 이성계기단을 찾아 대웅전 앞 축대 밑으로 가파른 벼랑길을 내려서자, 설대가 우거저서 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담뱃대와 화살을 만들었던 설대숲의 터널은 끝을 가늠하지 못하고, 그저 어딘가로 이어지겠지 하는 믿음만으로 뚫어진 외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서야, 하늘이 열리면서 위로는 보리암의 당우들이 벼랑의 중턱에 제비집 같이 붙은 것이 보이고, 사방은 온통 기암괴석들이 기기묘묘한 형상을 하고 육중한 덩치로 거드름을 피우는데, 그 수가 눈가는 곳마다 빼곡하여 감히 대적해 볼 엄두가 나지 않으나, 장부의 체통도 있고 해서 ‘어험’ 하고 헛기침을 크게 하고 끊어질듯 이어지는 바위 틈새로 난 길을 따라 작은 산등성이에 오르자, 단청이 화려한 단아한 기와집 한 채가 거암거석을 광배삼아 낭떠러지의 턱받이 위에 고즈넉하게 앉았다.

나무계단과 돌계단을 번갈아 오르내리며 다다른 암반위에, ‘선은전’이라는 현판이 붙은 팔작지붕의 삼간겹집 좌우의 칸에는, 용마름의 가첨석을 얹은 ‘남해금산영응기적비’ ‘대한중흥송덕축성비’라 쓰인 거대한 비석을 짊어진 돌 거북이 무게가 버거워서 눈이 퉁방울처럼 튀어 나온 채 납작하게 엎드렸고, 조각된 청황룡이 ‘태조고황제기도처’라 쓰인 목비를 길게 세워 잡은 가운데 칸에는, 일반 가마와는 확연히 다른 비단주렴을 화려하게 드리운 연(輦)이 옛 주인을 기다리며 소곳하게 앉았다.
1이성계 기단
이성계 기단

‘장군! 보리암 너머 부소대의 향엄스님께서 장군이 예까지 온 연유를 죄다 일러줍디다.’ 들은 대로 아뢰었다. ‘태백산 산신령께 무장을 하고 갔다가 쫓겨 나셨다면서요?’ ‘한번 경을 쳤으면 됐지 지리산 산신령께는 무장을 풀고 갔어야지요.’ ‘꾸지람 한다고 칼을 뽑아 드셨으니 반야봉으로 건너뛰어 아직도 천왕봉으로 안 오셨답디다.’ ‘여기서도 한 성질 하셨더라면 어찌될 뻔 하셨습니까?’ 묵묵부답이라 ‘요즘 TV드라마에서는 삼봉의 말은 잘도 듣더니만…’ 군담까지 했으나 장군이 머물다 가신지 620여년이 지났으니 무슨 소린들 들리겠냐만 금산은 백두대간의 그 어디에도 맥을 잇지 않고 있어 굴러들어온 산이라 하여 ‘전이산’이라했다지만 새 왕조를 점지한 영험한 산이다. 장군은 기도 끝에 한수를 건너지 말고 기다리면 기미가 보일 것이라는 신령의 답을 듣고, 개국조선의 왕좌에 오르셨으니 ‘전이산’을 비단으로 감싸도 아까울 게 있었겠냐만 영원히 빛이 바래지지 않게 비단금자의 ‘금산’으로 개명을 하여 보은을 했다니 그럴싸한 정감이 흐른다.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 보리암범종각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비탈길을 오르자, 보행을 나선 주지 능원스님은 장삼자락을 펄럭이며 화엄바위를 돌아서 구름같이 어디론지 홀연히 사라지고, 좌선대를 앞세운 제석봉 건너편에 치마폭 드리워 천인단애를 이룬 상사바위가 못다 한 정이 한이 되어 중천에 홀로섰다.

부소대를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허리가 잘록한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뒤돌아 보이는 끝없는 바다는 하늘과 맞붙어 어름을 알 수 없고, 금성산을 내려놓고 호구산을 무릎에 앉힌 우뚝한 망운산이 건너 뛸 듯 가까운데, 잡목 우거진 비탈길을 내려서자 웅장한 바위 봉우리가 느닷없이 불쑥 솟아 장엄한 비경을 철다리로 이어놓고 찾는 이를 반기건만, 재가불자 표 낸다고 회색 옷 지어 입고, 관음성지 보리암의 보광전 찾아들어, 지은 죄 씻어주고 온 가족 복 달라고, 불전 한 닢 올려놓고 향 사르고 절하면서, 한나절을 떼만 쓰다 삼층석탑 세 번 돌고, 산신각 참배하고 휘젓고 다니는 그들이나, 울긋불긋 등산복에 쌍지팡이 배낭 메고, 쌍흥문 장군바위 음성굴 용굴 둘러, 화엄바위 힐끔 보고 흔들바위 흔들더니, 좌선대 밑을 돌아 상사바위 올라서서, 이기양양 개선장군 있는 대로 폼을 내고, 휙-하니 정산 둘러 하산하는 그들이나, 보리암에서 20분이면 족한 완만한 길인데도 찾는 이는 거의 없어, 언제나 괴괴하고 한적한 부소대는 태초의 비경으로 오롯이 남았는데, 만리타국 유배 왔던 진시황제의 아들 부소의 애달픈 숨결을 머금은 채 인적조차 드물어 적적하기 그지없다.

수십 길 낭떠러지의 틈새를 걸쳐놓은 철다리를 건너서서 부소대의 허리를 돌아가면, 손바닥만 하게 펑퍼짐한 층을 이룬 축대위로 벽면만 보수한 삼간정도의 빨간 슬레이트 건물에 부소암이라는 작은 현판이 붙었는데 스님은 간곳없고 자물쇠는 녹이 쓸어 인적 없는 빈 절임을 황량함이 일러준다.

“들어오시게” 한참을 빤하게 보시던 노스님은 대나무 사립문 안쪽의 문고리에 굵은 철사를 나선형으로 말아서 꽂은 양심에 맡긴 자물쇠를 풀어주시더니 초면인데도 녹차를 따라주시며 “절을 지어서 보리암으로 넘겨줄까 아니면 현금을 줘서 지으라고 할까?” 하시기에 “스님의 구상대로 절을 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 많은 돈이 어디 있습니까?” 춘분을 전후하여 칠일 사이의 새벽에 세존도 위로 노인성이 지나가니 때를 맞추어 기도를 하면 소원을 이룰 것이니 들리기나 하라면서 “돈은 지금 갖고 있어” 하셨던 2~3년전의 향엄스님의 이야기를 했더니 “외인출입도 금하시고 신도접견도 마다하신 스님께서 거금을 공개하신 까닭은 불사를 의논하자는 뜻이었는데 어찌 그리 무심하셨습니까? 스님께선 열반 하셨습니다.” 순간 ‘앗 불사! 이 죄업을 어쩌나!’ 가슴이 철렁했던 때가 20여년이 지났어도 두고두고 미안하다. 향엄스님과 차를 마셨던 같은 방의 같은 자리에서 젊은 스님은 차를 따르며 “아무런 남긴 말씀도 없고 상자도 두지 않아 이곡사에 있는 문도의 조카뻘을 찾아서 7000여만원을 전달하였답디다.”하던 생생한 기억을 더듬으며 철다리 말고도 들고나는 방법까지 향엄스님께서 보여주신 부소대의 유일한 비밀통로로 발길을 옮겼다. 일반인은 알지도 못하는 당시의 비밀통로는 새로 낸 등산로의 끄트머리에 그대로인데 이승의 끝을 미리알고 하신 말씀을 미련한 중생이 깨닫지 못한 죄가 가슴을 짓누르고 향엄 가신지 이십여년이 지났건만 두고두고 죄스럽다. 아방궁과 만리장성의 축성은 부당하다는 부소를 시황제의 편을 들어 귀양을 보냈으나 귀양에 풀려나면 보복을 염려하여 불로초를 캐어 오겠다며 망명을 위장한 도망길에 올랐다가 동남풍에 밀려와서 부소와의 기막힌 만남과, 또 다시 도망을 가며 서시가 지났노라고 ‘서시과차’라는 흔적을 새긴 금산 자락의 석각문자 말고도, 사량도 조리바위에도 같은 문자를 남겨둔 위치까지 일러주시며, 춘분 무렵이면 배를 띄워도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아래 포구와 마을의 옛 이름도 알려주셨건만 중생의 몽매함과 속절없는 세월에 잊고 말았으니 안타깝고 애달파서 부소대에 등을 대고 세존도를 바라보니 망망대해는 끝 간 데가 없었다.

/지역문제연구소장

3부소대
부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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