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남강 절벽 바위글씨 인물 열전 <2>
진주 남강 절벽 바위글씨 인물 열전 <2>
  • 최창민
  • 승인 2014.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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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용(이지용)·윤명근·황재돈·강신호 편
진주 남강 절벽 ‘한규직·한규설·정일용·채규상·김재은’ 이름이 각자된 바위의 모서리를 경계로 오른편에는 이은용(이지용)·윤명근·황재돈·강신호 등 5명의 이름이 크게 새겨져 있다. 또 육안으로는 잘 확인되지 않으나 이은용 큰 글씨 아래, 강신호 큰 글씨 왼쪽에는 정광석(?)·김병석 등 3명의 이름도 작은 글씨로 각인돼 있다. 특히 이 바위글씨는 의암 주변에서 보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강진 교수(동서대학교 영상매스컴학부 영상문학전공)는 “남강 절벽 바위 모서리를 두고 을사늑약(1905년)을 끝까지 반대한 한규설(바위 모서리 왼편)과 이를 찬성한 매국노 이은용(이지용)의 이름이 크게 바위글씨로 새겨져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은용(李垠鎔·생몰 미상)·이지용(李址鎔·1870~1928년)

진주 남강 절벽 바위 맨 왼쪽 바위글씨 주인공인 이은용과 맨 오른쪽 바위글씨 주인공인 이지용은 동일인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은용은 조선 말기의 친일파·민족반역자이자 을사5적의 한명인 이지용과 같은 인물인 것이다. 이은용과 이지용이 동일인이라는 근거는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하강진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은용은 1899년 경상남도관찰사와 경상남도재판소 판사를 겸임중 임기동안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한 죄목으로 1900년 6월 말 관찰사와 판사직에서 파면됐다. 2개월 후 8월 18일 징계 사면을 받고 다시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됐을 때까지는 ‘이은용’이라는 이름이 나왔으나, 이후로는 국가공식기록인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이은용’이라는 이름이 사라진다.

그러나 3일 후인 8월 21일 ‘고종실록’에 궁내부 특진관으로 ‘이지용’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왔다. 이는 이은용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종의 7번째 아들이면서 순종의 이복동생인 이은(李垠)이 1900년 8월 영친왕에 책봉되자 그와 같은 이름자(垠)를 피하기 위해 이은용이 이름을 ‘지용(址鎔)’으로 개명했기 때문에 그 이후 기록에는 모두 ‘이지용’으로 나오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에도 이은용과 이지용을 동일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은용·이지용 바위글씨가 새겨진 시기는 모두 잘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은용이 이지용으로 개명한 점을 미루어 이은용이 먼저 새겨졌고, 이지용은 후에 각인됐음을 알 수 있다. 이지용 바위글씨는 친일행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게되자 진주지역 권력 아첨군들이 아부하기 위해 재빠르게 빈공간이었던 황재돈의 오른쪽에 크게 새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지용은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은용, 자는 경천(景川), 호는 향운(響雲), 완영군 재긍(完永君 載兢)의 아들로서, 1870년(고종 7)에 서울에서 출생했다. 흥선대원군의 형 흥인군(興寅君) 이최응의 손자이다.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 등 요직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899년 7월부터 1900년 6월까지 경상남도관찰사를 지냈다. 백성을 착취한 죄목으로 관찰사에 파면된 뒤 사면으로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됐고, 이후에는 주일전권공사,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일본에 다녀와 외부대신 서리로서 한일의정서에 조인했다.

법부대신 ·규장각학사 ·돈령부판사 등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 때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과 함께 을사5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6년 대한식산장려회 총재를 맡았고 1907년 동아개진교육회 찬성장을 맡았다. 1907년 중추원 의장이 되고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일본 정부가 주는 백작 칭호를 받고, 조선귀족일본관광단의 일행으로 일본 천황의 생일 연회에 초대되어 참석하였다. 1912년 도박죄로 태형을 선고받고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되었다. 친일단체인 조선귀족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1928년 사망하였다.

◇윤명근(尹明根)

이은용 바위글씨 오른쪽에는 윤명근이 새겨져 있다. 1886년 6월부터 1889년 1월까지 남해현령을 지냈으며, 고종 27년 1892년 삼척포진영장에 임명됐다는 기록이 ‘고종실록’에 전할 뿐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단지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 찬물래기공원내 비석군에 윤명근의 선정을 기리는 ‘營將尹公明根淸德碑(영장윤공명근청덕비)’가 서 있는 것을 미루어 보면 윤명근은 매우 청렴하고 덕이 많은 관리였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하게 언제 새겨졌는지도 알 수 없다.

◇황재돈(黃在敦)

윤명근 바위글씨 오른쪽에 새겨져 있는 황재돈 역시 기록을 찾기 힘들다. 단지 1899년 12월부터 1910년 2월까지 경상남도관찰부 주사를 지냈다는 기록만 확인했을 뿐이다. 각자 시기 또한 알 수 없다.

◇강신호(姜信鎬·1904~1927년)

바위 아래쪽에는 다른 각자와 다르게 가로로 강신호 이름이 큼지막하게 각인돼 있다. 각자된 시기는 알 수 없다. 바위글씨 인물 중에 몇안되는 권력자가 아닌 인물이다. 요절한 비운의 천재화가를 잊지 못한 누군가가 바위글씨로 그 이름을 새겨놓았지 않았나 싶다.

강신호는 1920년대 우리나라 미술계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요절한 천재 서양화가다. 진주봉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매국계몽운동가인 강재순의 4남 1녀 중 막내로 진주 가좌동에서 태어났다. 특히 그는 항일독립운동가(첫째 형 강상호)·아동운동가(셋째 형 강영호) 두 형을 두고 있다.

강신호는 21세때인 1924년 5월 휘문고보 재학중에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아침의 정물’이 입선하면서 우리나라 미술계에 그 이름을 처음으로 알렸다. 졸업 후 도일해 1925년 4월 동경미술학교 양화과 입학했고, 그해 5월에 열린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그의 작품이 입선작으로 당선됐다. 당시 그의 작품은 ‘손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머리를 써가면서 그린 그림으로 결코 기교의 장난이 아니며 시적인 맛이 느껴지는 귀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그는 기교가 아닌 내면의 심오한 세계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우리나라 미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청년미술가로 인정받았다.

특히 1926년 2월 동경 중앙미술전람회에서는 ‘정물’과 ‘의자 위의 과실’ 두점이 입선돼 일본에서도 관심을 받게 된다. 당시 미술학교 출신 입상자가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1학년생이 입상한 것도 그가 유일했다. 이에 국내 신문에서는 ‘근래에 드문 비상한 천재가 나타났다’고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이후 강신호는 1926년 5월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다음해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작품 제9’가 특선을 한데 이어 ‘바구니를 든 남자’와 ‘꽃’이 입선하는 등 무려 3점이 입상했다.

강신호는 동경에서의 유학중에도 고향에서 개인전시회를 개최할 것을 항상 생각했다. 이에 1927년 하계방학을 맞아 7월 23일부터 26일까지 자신의 작품과 동료화가들의 작품 30여점으로 진주공원내 물산진열관에서 전시회를 갖기로 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전시회는 국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강신호는 전시회 당일인 23일 오후 더위를 식히기 위해 촉석루 아래 의암 부근에서 수영을 하다 익사, 요절했다. 당시 강신호의 사망에 대해 신문들은 ‘반도 미술계의 큰 손실’이라고 보도하며 애도했다.

생이 짧았던 관계로 그의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아 실제 작품은 찾아 보기 힘들다. 이에 따라 강신호 미술세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최창민기자

자료 제공=하강진 동서대학교 영상매스컴학부 영상문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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