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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9)<50>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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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6: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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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9)
<50>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2) 
 
 
필자가 경남문인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 아마도 1993년경으로 기억이 되는데 고성문인협회를 방문했었다. 경남문협에서는 각 시군 지역문인협회 행사때 지도 방문이라는 명분으로 웬만하면 회장단을 파견했었다. 고성문협의 문학의 밤 행사에 참가하고 격려사를 했다. 그날밤 행사후 후렴잔치까지 끝내고 난 뒤, 숙소를 당항포에 있는 경관이 수려한 호텔로 정했다 하며 이상옥 시인이 안내를 했다. 이때는 아직 이상옥 시인이 창신대학 교수가 되기 전이어서 마암면 생가에서 지냈다.

한밤중 당항포 바다는 잠들지 않고 잠들려 하는 나그네 머릿속으로 까지 치고 들어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은 김춘랑 시인(당시 경남문협 부회장)의 집 초대를 받아 아침 식사는 당항포 유원지에 있는 김시인의 집 식탁에서 하게 되었다. 그날 아침 메뉴는 쑥국을 비롯한 바닷고기였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쑥국의 향취만 남아 있다. 지금까지도 쑥국을 먹을라치면 이때의 쑥국맛이 더 좋았다는 생각에 젖곤 한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김시인은 필자를 보고 “우리집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하고 진정으로 환영해 주었다. 필자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렇게 정중한 인사를 받아본 바가 없다.

필자가 진주문인협회 상임간사(사무국장을 그렇게 불렀음)로 있을 때 이야기다. 1969년이거나 1970년 개천예술제였을 것이다. 문학부 행사인 백일장을 마치고 진양호 유람선을 탄 것으로 보아 백일장 다음날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예산이 너무 빠듯해서 이날쯤이면 간사의 호주머니는 완전히 비어 있었을 것이다. 유람선에는 한국문협 심사지원팀의 이우종 시조시인, 유성규 시조시인, 고성의 김춘랑 시조시인, 지부장 리명길 박사, 그리고 필자 등 5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전날 김춘랑은 문학의 밤에서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는데 강동주나 박재두, 신찬식, 김영화 정도가 멤버였으리라. 떡이 되었다는 말은 인사불성의 경지를 말한다. 스스로 스스로를 망각하는 상태, 집인지 길거리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태,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 불능의 상태, 거지인지 가족인지조차 구별 감식 능력의 끈이 훼손되어버린 상태, 그런 상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 아닌가? 필자는 이런 경지에 한 번이라도 놓일 수 있다면 시를 더 잘 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하는데, 그것은 이날밤 김춘랑의 경지를 부러워하는 데서 출발한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진주시 돌아앉은 어느 골짜기 모닥불이 시위어가는 노천이더란 것이다. 그 곁에는 아직 수면에 들어 있는 깡통을 찬 거지선생들이 마치 성인들처럼 주무시고 계시더라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거지가 되었다.

그 모습으로 그는 유람선의 일원이 된 것이었다. 김춘랑은 시조창을 하기 시작했다.“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이면-----다시 ----오기 어려-----왜라” 이때 필자는 너무 지루한 나머지 “그래봐야 그 리듬이 사람을 놓치고 말아. 3백리는 갔을 것인데, 버스 뒤에다 대고 무슨 벽계수가 닿는가.”그리 빈정댔는데, 이 말귀를 좌중에서는 이우종 한 분만이 알아듣는 것 같았다. 리명길 박사도 창이라면 물러서지 않는 분인데 이날따라 조용히 있다가 술끼를 이용했는지 “아요, 춘랭이 너 이제 가 봐라.”하고 축객을 하는 것이었다. 문협 집행 예산이 바닥이 난 터에 공식 초청 케이스가 아닌 문인까지 다 함께 갈 수 없다는 재정상의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김춘랑은 못들은 척하고 저녁때까지 동행하며 더 크게 웃으며 소정의 시간을 막무가내 보내다가 갔다.

그래도 집에서는 가장으로서의 위풍은 세우지 못했던 것 같았다. 경남 단위의 어떤 페미니즘 주제의 세미나가 있었을 때 남성이 여성을 무의식중에 홀대하거나 하대하는 풍조는 없애야 한다는 것이 발표와 토론의 중심 흐름이었다. 그때 김춘랑은 손을 들고 좌중을 한 번 흔들었다. “무슨 소리들 하시는 거요. 오늘 이 시대는 여성 상위시대이고 여존남비 경향으로 깊숙이 들어왔단 말이예요.나는 부끄럽지만 우리집에서는 요강단지를 들고 벌을 받습니다. 집사람이 쓸데 없는 소리, 요강단지 들어! 하면 꼼짝없이 요강단지를 어깨 위로 치켜 들어야 합니다. 참고하십시오.”하는 것이었다. 그때 이후 필자는 지금까지 이때 김춘랑의 말이 비유로 한 것인가, 사실 그대로인가 어느 것이 맞는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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