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 뽑기
전봇대 뽑기
  • 경남일보
  • 승인 2014.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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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진 (경상대 EU연구소장, 건축학과 교수)
외국 나가기가 어려웠던 1980년대 중반 필자가 유럽에 유학 가서 제일 먼저 놀란 것은 잘 정리된, 수려한 도시공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선이 지중화되어 있어 우리나라와 같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흉측한 정경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사실 전봇대는 좋은 동네의 상징물 중의 하나였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촛불을 켜고 사는 곳이 많아 전봇대가 없는 동네나 마을은 전근대적이며 낙후된 곳으로 취급받았다. 그 이후에 산업이 발전되고 경제가 부흥하면서 전봇대는 도시와 지역에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특히 새마을운동은 농·어촌 마을에도 도시처럼 전기를 제공함으로써 시골 사람들에게 산업기술의 혜택을 누리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야간생활의 불편을 해소해 줌으로써 전봇대는 그야말로 동네의 자랑거리요 자긍심이었다. 또한 새롭게 들어서는 산업단지 등에는 거대한 전신주가 줄지어 들어서서 가난함을 벗어가는 신흥경제국의 부흥을 알려주는 표상이 되기도 했다. 전봇대가 가지는 의미가 이처럼 컸음으로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필자는 허리에 줄을 감고 전신주 위에서 공사나 수리를 하는 분들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 보여 한참을 구경하곤 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전기보급이 당연시되고 도시미관과 쾌적성이 더 중요시되면서 전봇대는 서서히 애물단지로 변해갔다. 급기야는 도시미관을 해하는 주범일 뿐만 아니라 국민 건강을 해치고 재난과 안전위험 등을 불러일으키는 위협적인 요소로 전락해 홀대를 받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오늘날 전봇대에 관한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주로 충돌로 인한 자동차나 사람의 상해나 태풍이나 주변 공사 등의 이유로 전신주가 쓰러져서 발생한 재난에 관한 것들이다. 최근 갈등을 겪고 있는 밀양 송전탑 사태만 보더라도 전기 수송수단에 대한 국민적 이미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는 전자파가 신종 공해로 떠오르면서 인체, 농작물, 자연에 미치는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덕꾸러기가 된 전봇대가 우리나라에서 사회 및 정치의 전면 이슈로 떠오른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는 2008년 당시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전남 영암에 있는 한 산업단지의 전봇대를 거론하면서부터이다. 전봇대의 높이가 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드나드는 대형장비들보다 낮아 이들이 통과할 때마다 매번 전선을 절단했다 다시 붙였다함으로써 많은 번거로움과 비용이 수반됐다. 이를 전형적인 탁상행정과 비시대적 발상의 대표적 문제점으로 질타했고, 그 전봇대는 바로 뽑히게 됐다. 이후 ‘전봇대 뽑기’는 MB정권의 규제개혁의 성격을 말해주는 핵심단어로 사용됐다. 이로써 근대화, 산업화, 경제부흥, 새마을 가꾸기의 상징이었던 전봇대는 빨리, 그리고 뿌리째로 뽑혀 버려야 하는 최악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오명을 쓰게 됐다.

최근 신도시 개발이나 기존 도시구역에서 전선 지중화사업을 상당수 진행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전봇대에 대한 인식과 의미가 이처럼 변하였음에도 담당기관의 태도는 아직 대단히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지역에 최근 조성한 정촌의 모 단지만 보더라도 전깃줄이 공중에 거미줄처럼 엉켜 있어 맵시 있는 의류를 판매하는 아웃렛 특성화 단지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구기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전선 지중화사업의 더 중요한 이유는 태풍이나 지진이 왔을 때의 정전피해 등이다. 작년에 왔던 태풍 볼라벤만 하더라도 약 195만 가구의 정전피해를 가져다 주었고, 이는 생산 및 산업시설, 양식장, 횟집 등의 국민 및 국가경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최근에 진주는 혁신도시, 신역세권, 산업 및 농공단지 등의 조성으로 유사 이래 가장 큰 변혁을 겪고 있다. 이제 말로만 천년의 아름다운 도시라 하지 말고 전봇대부터 시원하게 뽑아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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