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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90)<51>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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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6: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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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90)
<51>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3) 
 
김춘랑은 바둑 1급으로 아마 5단쯤 되는 실력으로 알려져 있다. 이영성 시조시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한번은 박재삼 시인이 진주 개천예술제에 왔을 때 김춘랑이 바둑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박재삼 시인은 서울신문에 ‘요석자’(樂石子)라는 필명으로 명사 대국 해설을 쓰고 있었고 기계에서는 국수라는 별명으로 통하고 있었다. “형님은 시골 명사에게도 기회를 주셔야지요. 맨날 서울 사람만 명사반열에 들고 촌놈은 바둑을 둘 만큼 두어도 촌바둑입니까?”하고 대들었다. 그래서 백일장 심사를 마친 뒤 기원에 가서 일단 박김전을 갖게 되었다. 과연 김춘랑은 실력발휘를 하여 박재삼을 백병전 혈투 끝에 굴복시키고 말았다. 이때 박재삼의 바둑은 이형기,그리고 중안초등 동기인 고 강동호 교수 등과 어울리면 호형호제 하는 실력으로 알려져 있었다. 박재삼을 이긴 김춘랑은 박시인에게 “형님, 나도 명사대국 한 판 끼워 주세요.”하고 졸라 그해 경향신문 명사대국에 참전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김춘랑에 관한 이야기 중 절필(絶筆)에 관한 것이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그는 1976년부터 절필을 하고 1989년부터 활동을 재개한다. 절필을 한 까닭은 마산의 선배시인 정진업의 사연과 연결된다. 1974년 정진업 시인이 ‘현대문학’에 발표한 시는 시인의 가난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정시인의 딸이 중학생이었는데 먹을 게 없어 비실거리다 영양실조로 죽었다. 이를 소재로 하여 가족의 호구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뼈저리게 한탄하는 시였다. 이 시를 읽은 김춘랑은 당시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에 정시인의 자탄이 곧 자기의 자탄으로 연계되어져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시인이더라도 생활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무능한 시인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끙끙 앓으며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고 일단 비장한 각오로 절필에 이른 것이었다.

절필하면서 쓴 시조가 1976년 6월호 월간 ‘시문학’에 발표가 되었다. “요즘도 나는 시를 쓴다/ 몸으로 시를 쓴다/ 식료품 배달 자전거에 만근 업고를 싣고/ 바쁘게 페달을 밟으며 보람의 시를 쓴다// 어떤 이는 나를 보고 장사꾼이라 하고/ 어떤 이는 시를 버린 수전노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나날인데 지금 나는// 그리하여 날이날마다 몸으로 쓰는 나의 시는/ 때로는 동전되고 때로는 지폐되어/ 죄없는 내 가솔들의 웃음이 된다 울음이 된다”(김춘랑 ‘몸으로 쓰는 시’전문) 이 시는 필자에겐 김춘랑의 대표작으로 읽힌다. 평이한 문장으로도 군더더기를 잘라내 버린 시조인데, 시조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 훤출하다. 몸으로 시를 쓰겠다는 각오는 누구나 할 수 없는 결정이다. 결단과 체험의 내면은 욕심과 명예 같은 것을 떼놓아 버리는 행위이므로 생각에 먼지나 지푸라기 같은 것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김춘랑이 젊은 시절의 어느날 서울에 갔을 때인데 기라성 같은 서울의 시인 작가들이 다방에 모여 있었다. 당시만 해도 다들 어려운 때라 찻값을 누가 낼지 서로들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김춘랑은 선뜻 찻값을 지불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김춘랑의 이 당당한 모습을 지켜보던 현대문학 주간 조연현은 통큰 김춘랑에 반해 그후 김춘랑의 시조를 현대문학지에 발표시켜 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쪽 문인들은 꼬락서니가 잘고 이기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지방에 내려와서는 있는 대접 다 받고 가면서 서울에 간 시골 사람들은 만년 냉대를 받기 일쑤였던 것이다. 다 그렇기야 할까마는 대체로 그런 상황에 오히려 시골 문인들은 먼저 손수건을 던져버린다. 이른바 대접 마조키스트 상황을 기쁘게 감수들 하는 것이다.

그는 일정 부분 사회비평적인 시조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문덕수 시인이 쓴 ‘김춘랑’이라는 시가 이를 지적해 놓고 있다. “고무신 끌고 서울 와서는 / 해방문단의 풍운아 조연현에게 /대거리하며 형님 그래서 되나/ 그래서 되나 큰 소리 탕탕 쳤다/ 왕관도 없는 옛가야땅 성주/임금P에게는 비수를 던지고/ 임금 J에게는 화살을 날렸으니/ 시인의 기개는 성벽보다 높다/ 트럭 몰고 팔도 그석 구석 누비던 /억센 그 손이 바둑을 쥐면/ 국수는 아니지만 1급의 신선이다”(문덕수 ‘김춘랑’ 부분)

‘고무신 끌고 서울 가서는 시골이나 서울이나를 구별하지 않고 할 이야기는 하는 사람, 기개가 하늘을 찌르는 사람, 바둑이 1급인 옛가야 성주인 사람’으로 그려놓고 있다. 갑자기 김시인이 보고싶다. 필자가 단골로 다니고 있는 신안동 ‘한솔보리밥집’으로 그를 초대하고 싶다. 인심 좋은 주인이 막걸리 한 병 선물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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