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남강 절벽 바위글씨 인물 열전 <4>
진주 남강 절벽 바위글씨 인물 열전 <4>
  • 최창민
  • 승인 2014.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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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주·이규대·이용상·황의호·이석구·신복균·신종균 편
김응모·정기택·이범직·조중익 이름이 새겨진 바위 오른쪽 바위에는 많은 이름이 각인돼 있다. 이 바위에는 이름 모두가 확인가능한 인물은 물론 일부만 확인이 가능한 인물 등이 섞어져 각자돼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11명의 이름만이 겨우 알 수 있다. 각자된 많은 인물들에 대한 보다 면밀하고 체계적인 조사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 각자된 이름의 확인은 가능했으나, 이들에 대한 자료 부족 등으로 이력 추적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 이에 따라 이번 바위글씨 인물 열전에서는 이력 추적이 가능한 인물들을 기술했다.

인물 이력 추적이 가능한 이름을 살펴보면 바위 상단에는 왼쪽부터 이범주·이규대·이용상 이름이 나란이 각자돼 있으며, 하단에는 황의호·이석구·신복균·신종균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에 각자된 주인공의 면면을 보면 경상남도관찰사는 한명도 없었으며, 진주군수를 비롯한 고성부사, 김해군수 등 인근 지방의 수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 관찰사를 보좌한 주사·총순들의 이름도 각자돼 있었다. 그리고 형제로 추측되는 인물도 나란이 크게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범주(李範疇·1879∼?· 1901년 ‘範九’로 개명)

이범주 이름은 바위 맨 왼쪽에 새겨져 있다. 바위글씨는 이범주가 1902년 4월 29일부터 9월 28일까지 5개월간 진주군수를 지냈던 것을 기념해 새긴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이범주는 1901년 6월 이름을 ‘범구(範九)’로 개명했는데, 바위에는 개명이 아닌 본명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범주(範疇). 1888년(고종 25)까지 가정에서 수학하다가 1895년 고등소학교에서 수학한 뒤 1899년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됐다. 1900년 승훈랑에 제수되고, 1901년 능주군수, 1902년에는 통정대부·흥양군수·진주군수 등을 맡았다. 1905년 1월 중추원의관에 임용되었고, 비서원승을 거쳐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재임하면서 1905년 7월에 일본국시찰사무원이 되어 일본시찰을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10월 농상공부협판이 되었고, 이듬해에 서훈3등 태극장을 받았다. 그해 11월 궁내부협판에 이어, 1906년 봉상사제조를 역임했다.

한편 국사편찬위원회에 실린 ‘대한제국 관원 이력서’에는 한자 마저 같은 이범주(李範疇)가 2명 나오는데, 바위글씨의 주인공인 이범주는 을미사변을 방관한 죄로 1896년 3월부터 10년간 제주도에 유배된 이범주와, 구한말 의병장인 이범주와는 서로 다른 인물이다.

◇이규대(李奎大)

하강진 교수(동서대 영상매스컴학부 영산문학전공)의 논문에 따르면 이규대는 1894년 11월부터 1896년 12월까지 2년이 넘게 김해군수를 맡았던 인물이다. 특히 이규대는 암행어사의 감찰에 의해 김해군수에 파면됐다. 김해군수를 지냈던 이규대의 이름이 언제 어떻게 진주 남강 절벽 바위에 새겨질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암행어사의 감찰에 의해 파면됐다는 사실은 선정을 베푼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만 추정될 뿐이다. 기록 또한 거의 없다.

◇이용상(李龍相)

이용상 역시 이규대와 마찬가지로 전해지고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 한성사범학교 부교관에 지내다 1899년 11월 23일 경상남도관찰부 주사로 임명된 이용상은 1900년 3월 17일 면직된 기록만 있을 뿐이다. 바위글씨 또한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새겨졌는지도 알 수 없다.

◇이석구(李錫求)

이석구 역시 거의 기록이 없는 인물이다. 단지 1900년 1월 16일 경상남도관찰부 총순으로 임명됐다는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이후 언제 총순에서 면직된 시기도 알 수 없다. 총순은 구한말 경무청에 속한 판임관으로서, 경무관 다음 서열로서 30명 이하의 정원을 두었던 직책이다. 이를 감안하면 이석구는 당시 경상남도관찰사였던 이은용(지용·재임기간 1899. 07~1900. 06)과 김영덕(재임기간 1900. 06~1901. 09)을 보좌했던 경찰 역할을 수행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바위글씨가 각자된 시기 또한 알 수 없다.

◇황의호(黃義浩)

황의호 또한 기록이 거의 없다. 1903년 5월부터 1903년 9월까지, 1904년 2월부터 1905년 10월까지 2차례에 걸쳐 경상남도관찰부에서 주사 업무를 수행했던 인물로 기록돼 있다. 관찰사를 보좌하면서 행정업무를 맡았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황의호 이름이 언제 바위에 새겨졌는지 역시 알 수 없다.

◇신복균(申復均)

신복균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다. 별군직 사복시 내승으로 있다가 1888년 6월 고성부사로 임명된 인물이다. 1888년 12월까지 6개월간 고성부사로 재임했다. 신복균은 1888년 12월 함종부사로 발령됐다. 바위에 이름이 각자된 시기 역시 알 수 없다.

◇신종균(申從均)

신종균 역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하강진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신종균은 사복시 내승으로 재임하다 1885년 11월 고성부사에 임명된 인물이다. 1886년 12월까지 고성부사를 재임했으며, 12월 훈련원 정(正)으로 옮겨갔다. 특히 이름 오른쪽에 ‘병술제(丙戌題)’라는 글자가 작은글씨로 각인돼 있어 신종균 이름이 각인된 시기를 알려주고 있다. 1886년이 병술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신종균 이름이 바위에 새겨진 시기는 1886년으로 추정된다.


자료 제공=하강진 동서대학교 영상매스컴학부 영상문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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