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 행보
길들여진 행보
  • 경남일보
  • 승인 2014.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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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윤 (경남복지정책연구원 이사)
창원까지 와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를 위해 병문안을 다녀왔다. 친구는 병실 천장을 막연히 올려다보며 누워 있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냐’고 아는 체를 하자 그저 멀거니 나를 보더니 눈가를 적신다. 엊그제만 해도 동서가 간병을 해 주더니 사정이 있어 돌아간 모양이다.

친구는 시쳇말로 자식농사를 잘 지어 큰아들은 유수 회사의 외국지사에 나가 있고, 작은아들도 대기업에 다닌다. 한창 때는 아이들 키운다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뒷바라지하느라 여념이 없더니, 요즘에야 간간이 전화를 해오며 오로지 잘 나가는 자식들 얘기만 하다 전화를 끊는데, 그렇게 행복했던 친구가 몸이 좀 안 좋다고 눈물이 나오나 싶으니 뜻밖이다 싶다.

“니네 남편 잘 있나?”, “엉? 어… 응!”, “있을 때 잘 해라.”

흔히 일찍 가려고 그렇게 잘했나 하는 말들을 종종 하는데, 친구 남편이 그랬다. 참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퉁명스럽고, 오직 자식뿐 남편은 등한시하는 부인인데 그래도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바라보곤 하더니, 퇴근길에 간다는 말도 없이 훌쩍 떠나 버렸다.

남편이 떠났다는 흔적 없이 자식들에게 매달리며 엄마 노릇에 빠져 있는 친구를 보며, 다들 안도하며 다행이라고 여겼다. 상실감에 빠지지 않고 잘 극복하는 모습이 고맙기도 했다. 그런 친구가 너무도 서글픈 속내를 털어놓았다. 자식사랑이 끔찍하던 친구에게 아이들이 그들의 세계에 빠진다는 것은 곧 그녀 삶의 표류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이들은 너무 바빴다. 뚜렷한 용건이 없으면 통화하기 민망하고, 또 용건이 있어도 용건만 간단히 해야 했다. 자신의 삶 가운데에 큰 웅덩이가 덩그러니 패어 있는 게 보였다. 남편이 떠나도 느끼지 못하더니 그제서야 절절한 상실감에 사로잡힌 친구는 주변의 눈도 의식하지 않은 채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혼자 있는 엄마를 팽개쳐 두고 어쩌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냐고, 니가 아이들을 영 잘 못 키웠다고, 배은망덕한 못된 놈들이라고 성화를 부리며 오버하는 내 앞에서 파르르 떠는 친구의 눈이 치켜떠졌다. 아마도 문을 닫고 나온 내 뒤통수에 대고 친구는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퍼부었으리라. 그리고 자식들 기억을 애지중지 감싸 안으며,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한 나로 인해 친구 앞에 파인 웅덩이는 어느덧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리라.

친구야! 삼십여 년을, 어쩌면 이런 보물들이 있을까 싶게 기쁨과 감사만을 안겨 준 아이들이 이제는 그들 세계를 마음껏 향유하도록 내던져 두자. 그리고 우린 먼발치서 아이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을 위해 남은 시간 기도로 채워가면 어떨까.

이서윤 (경남복지정책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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