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남강 절벽 바위글씨 인물열전 <5>
진주 남강 절벽 바위글씨 인물열전 <5>
  • 최창민
  • 승인 2014.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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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하·이항의·김영덕·윤대선
진주성 촉석루 아래 남강 절벽 한가운데 바위에는 위엄있고 장중한 서체의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 글자가 각인돼 있다.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이라는 글씨는 바위면의 전체 크기는 3.5m에 이르며, ‘열(烈)’의 글자 크기도 56×62㎝에 달하고, 또한 깊게 패여 새겨져 있어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이 글씨는 1619년 7월 김시민 장군의 전공비 비문을 쓴 한몽삼(1589~1662년)의 서체이다. 이 글씨바위를 중심으로 주변에 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특히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의 기상의 영향 탓인지 이 바위 주변 바위에 새겨진 인물들 중에 이름이 확인된 주인공은 대개 충절이나 기개이 높았으며, 업적을 크게 남긴 것이 특징이다.

◇이중하(李重夏·1846~1917)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 바위글씨 오른쪽 바위의 2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데, 그중 왼편이 ‘이중하’다. 이중하의 이름이 각자된 시기는 이름 옆에 ‘갑오위무(甲午慰撫)’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1894년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중하는 문신으로 전주(全州). 자는 후경(厚卿), 호는 규당(圭堂)·탄재(坦齋)이다. 좌랑으로서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885년 공조참의·안변부사가 되었다가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서 청국측 대표 덕옥(德玉)·가원계(賈元桂)·진영(秦瑛) 등과 백두산에서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지계(土門江地界)를 심사하였다. 국경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였으나 견해차가 심한데다 청국측이 강압적인 태도로 나와 회담은 실패하였다.

1886년 덕원항감리(德源港監理)가 되었다가 1887년 다시 토문감계사가 되어 회담을 재개했는데, 청국측이 조선측의 주장을 거절, 위협하자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며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특히 이중하는 두만강 상류의 간도 영토를 지켜낸 것은 매우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1890년 이조참의가 되어 충청도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1894년 외무부협판·의정부도헌이 되었고,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8월 영남선무사(慶尙道宣撫使)를 맡았다. 영남선무사 시절 이중하는 남방을 순행하면서 진주를 방문, 당시의 위무 자취를 기억하려는 뜻에서 자신의 이름과 ‘갑오위무’의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 이중하는 당시 갑오농민군에 상당한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영남선무사 때 진주에 머물면서 ‘촉석루 대청에서 남강을 손으로 가리키며 항전을 맹세한 삼장사를 술회한 뒤, 끝내 순국한 그들의 혼령이 옛 누각을 찾아왔다 돌아가는 장면을 상상하니 달빛도 걱정스럽게 보인다’는 내용의 시를 남겼다. 이 시에서 이중하는 ‘도둑이 설쳐대니’라고 읖어 당시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한 민중을 ‘도둑’으로 칭하고 있다. 이후 1895년 대구부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관찰사 재직시 을미의병 봉기로 많은 관리가 희생되었으나 그는 민심을 얻어 무사하였다. 1896년에는 병력을 파견해 김해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장 노응규 부대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 뒤 평안남도관찰사·경상북도관찰사·궁내부특진관을 거쳐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특히 1909년 일진회가 합병을 주장하자,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을 조직해 그 해 12월 5일 원각사에서 임시국민대연설회를 열고, 그 주장이 부당함을 공격하였다. 또, 1910년 규장각제학으로 경술국치(한일합방)를 극렬히 반대했으며, 그해 일제가 회유하기 위해 거액의 은사금을 주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경기도 양평에 은거했다. 지방관리 재직시 청렴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항의(李恒儀·1846~1925)

이중하 이름 오른쪽에 나란히 이항의 이름이 크게 각인돼 있다. 그의 바위글씨 역시 이중하와 마찬가지로 이름에 부기된 ‘동년안월(同年按鉞)’ 글자와 글씨체가 같은 점 등을 미루어 같은 시기인 1894년에 새겨진 것으로 확인된다. 동년안월은 이중하가 영남선무사로 순행하던 1894년 경상우병사에 부임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항의는 구한말 무신으로 선전관·공조좌랑·훈련원 첨정·흥해군수·홍주영장·총어영 별장 및 병방 등을 지냈다. 1894년 8월 경상우병사에 제수됐으며, 1895년 5월에는 갑오개혁으로 우병영 제도가 폐지돼 그만 두었다. 이후 의병장 노응규에 의해 쫓겨난 조병필을 대신해 1896년 2월 12일 진주관찰부 관찰사에 임명됐으며, 같은 해 6월 경상도가 분리되면서 초대 경상남도관찰부 관찰사로 제수됐다. 10개월간의 임기를 끝내고 1897년 4월 중추원 1등의관에 임명되었으며, 1898년 경상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1901년 중추원 의관, 1904년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근무했다.

특히 이항의는 경상우병사·진주관찰부 관찰사·경상남도관찰부 최초 관찰사 등을 지내는 등 다른 인물들보다 많은 기간을 진주에서 보냈다.

◇김영덕(金永悳·1859~1910)

김영덕의 이름은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 千秋義烈)’ 바위글씨 왼쪽 바위 측벽에 새겨져 있다. 김영덕의 바위글씨는 바위 사이 측면에 각인돼 있어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각자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영덕이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빼앗기자 비분강개하며 자결,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주사람들이 김영덕이 경상남도관찰사 였던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며, 그의 순국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바위에 새겼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김영덕은 구한말 문신이자 의사(義士)로, 본관 광산, 자는 수경(樹卿). 1877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주목사·동래부사·이조참의·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시강원보덕 등을 역임하였다.

관제개혁 이후에는 탁지부협판·궁내부특진관을 지냈다. 경기도·충청남도관찰사를 거쳐 1900년 6월에 이은용(이지용)의 후임으로 경상남도관찰사에 임명돼 진주에 부임했다. 1901년 9월까지 1년3개월동안 재임했으며, 경상남도재판소 판사도 겸직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점되자 이를 통탄하며, 자결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집안도 몰락하는 비운을 겪었다.

◇윤대선(尹大善)

윤대선의 이름이 있는 바위는 의암을 기준으로 가장 먼 좌측 바위 뒤쪽에 새겨져 있어 배를 타야만 확인할 수 있다. 윤대선은 경상남도근대교육을 개척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하강진 교수(동서대 영상미디어학부 영상문학전공)는 각자 시기를 근대교육 도입기에 진주와 인연을 맺어 진주의 인재양성과 교육발전에 앞장 선 그를 기려 진주사람들이 바위에 이름을 새겼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하강진 교수는 논문에서 1896년 1월 개교한 진주관찰부 공립소학교는 8월 지방관제 개편으로 경상남도관찰부 공립소학교로 자동변경되었고, 윤대선은 그해 10월 3일자로 이 학교 교원에 임용돼 1899년 4월까지 근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반해 경남 최초의 근대학교인 ‘진주중안초등학교(현 진주초등학교)’의 기록에는 1896년 4월 윤대선이 당시 진주우편취급소 자리에 진주공립소학교의 설립인가를 받아 학생 20명으로 개교하였다고 기술돼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하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윤대선은 경상남도관찰부 공립소학교에 근무하다 1899년 4월 5일 궁내부 수륜과 사검위원에 임명됐으나 3일만에 해임됐다. 이후 일정기간이 지난후 다시 경상남도관찰부 공립소학교에 부임해 근무하다 1902년 12월 평안북도 곽산군 공립소학교 교원으로 전보됐다. 그리고 1907년 2월 경기도 진위군 공립소학교 교원 근무 시절에는 군민들에게 국채보상회 취지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최창민기자
자료 제공=하강진 동서대학교 영상미디어학부 영상문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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