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92)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92)
  • 경남일보
  • 승인 2014.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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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5)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92)
<53>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5) 
 
신일수 수필가와 조종만 시조시인은 진주에서 창립된 경남수필문학회 회원으로 만나 깊은 우정으로 발전한 사이였다.

이 수필문학회는 박민기, 정목일,신일수, 정순영, 황소부, 최문석, 김인호 등이 기간 회원으로 출범했다.

문학회 현판은 신일수 회원의 꽃가게 기둥에다 걸었다. 필자가 수석이나 화초에 관심을 가졌다면 누구보다 신일수 수필가와 가까이 취미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그쪽에는 영 취향의 싹이 트지 않았다.

조종만 시조시인이 경남수필에 창립멤버인지 아닌지는 확신이 되지 않는데 신일수 회원의 기억으로는 창립멤버였다는 것이다. 그때 이후 신일수와 조종만은 20여년을 한결같이 휴일이나 방학때면 사계절 가리지 않고 강가나 계곡으로 수석 채취하러 나섰고 얕은 산 같은 데를 찾아 작은 분재 소재를 얻기도 하고 남해안 바닷가나 내륙 깊숙한 곳에서 채란을 하기도 했는데 근교는 물론 멀리 순천이나 벌교 심지어 여수까지 다녀오곤 했다.

신일수의 회고록에는 조종만과 난 채집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한 번은 초봄이었는데 순천을 벗어나 어느 골짜기를 한참이나 헤매다 갑자기 ‘심봤다’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에 쫓아갔더니 바위틈에 깊이 뿌리를 내린 춘란을 캤다며 희색이 만면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꽃봉오리가 5개나 달렸는데 그중 한 개가 살며시 잎을 피우고 환한 얼굴을 내미는데 분명 얼하나 없는 해맑은 소심이었다. 대개의 경우 춘란의 꽃들은 거의 줄무늬나 파란 테를 두르고 있는데 비해, 맑고 청정한 하얀 꽃잎이 마치 곱게 소복으로 단장한 새색시처럼 환한 미소를 내게 보내오고 있었다. 그때 그 순간처럼 티 없이 맑은 형의 미소를 일찍이 대한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3년이 지나 혼자 가질 수 없다며 내게 3촉을 분양해 주기도 했다.”

조시인은 후에 산청장학계장으로 있을 때 고교 평교사로 있던 신일수에게 산청 모사립고교에 교장 자리가 난 것을 알려주고 거기 응모해 볼 것을 권했다. 물론 그때 조계장은 신일수 교사가 교감자격 정도는 획득해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신일수 교사는 그런 관리직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교육법을 살펴 평교사로도 소정의 경력이 있으면 교장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아내고 본격적으로 서류를 갖추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다 말렸다. 길은 법에 명시되어 있어도 그를 획득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지난한 길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 길을 뚫었다. 신일수 평교사는 교장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필자가 신일수 교장으로부터 조교장 문상가는 차중에서 리얼하게 들을 수 있었다. 입지전적인 스토리였다. 그 배경에 조종만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조종만 시인을 만난 것은 삼천포여자중고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던 것 같다. 삼천포쪽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던 박재두(당시 삼현여자중학교 근무) 시조시인의 안내로 그의 자택을 찾아 차 한 잔 하면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사람이 조용해 보였고 천직을 교직으로 삼는 사람에게서 풍겨오는 특유의 격 있는 인상이었다. 의령 출신이고 부산사범을 나왔다는 말에 좀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삼천포와 의령, 삼천포와 부산사범이 거리감을 갖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1988년쯤 되었을까. 산청 신등고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할 적에 문인들 몇이 산청 단계로 가서 교장실에 들어가 조교장을 방문하고 학교방문 기념품 하나씩 얻고는 돌아나와 학교 앞에 있는 ‘아기자기식당’에서 추어탕을 먹었다. 학교 근방 식당들이 특징이 있어 진주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곤 하는 곳이었다. 오소리탕이나 비빔밥 잘하는 집도 있었던 것 같았다. 일행들은 조교장을 앞세워 내쳐 합천 가회까지 가서 ‘바람흔적미술관’이나 신라시대 ‘영암사지’를 구경하면서 각기 시심을 채집하기에 바쁜 시간을 가졌다.

그때 쓴 작품으로 보이는 조종만의 ‘가을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밤새 가던 길을/ 꿈꾸듯 깨어보니// 안개 속 산 사알짝/ 감춘 듯 푸는 햇살// 강산 다/ 뒤흔든 갈바람/ 구절초만 피운다// 한때는 푸르러던/ 초목도 애절한지// 하늘은 씻은 듯이/ 흰 구름 몇 조각만// 지나간/ 흔적이라곤/ 그리움만 심는다.” 갈바람, 구절초, 흰구름 몇 조각이 이미 지상을 떠나간 시인의 흔적인 양 애절함을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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